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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May 04. 2022

우정편지] 마롱으로부터 물속깊이에게

- 2022.3.28. 열 네번째 편지

오랜만입니다. 물속깊이님 편지를 기다리다가 먼저 써도 되잖아 라는 생각에 편지를 시작했어요. 이웃에 새로 짓는 집이 있는데 오늘은 공사를 안 하는지, 까치 소리만 가끔 들릴 뿐 동네가 조용해서 편지가 잘 써질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난달에 코로나와 싸우느라 애를 많이 썼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코로나를 피하려고 최선을 다했어도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남편에게 전염되고는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때문에 덕수궁 석어당 살구나무꽃과 집 근처 봉제산 벚꽃도 만나지 못했고, 안양천 오리에 작별 인사도 못 했죠. 또, 독방의 괴로움을 경험하고 배달의 민족을 자주 이용하고 일상이 소중해져서 욕심은 좀 줄었어요. 


물속깊이님은 어찌 지내시나요. 

회사는 여전히 바쁘고 지하철도 붐비겠지만, 설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외출했다가 하도 더워서 여름옷을 전부 꺼내 정리하고 선풍기도 반짝반짝 닦으면서 벌써 덥다고 구시렁거렸는데 일주일 후면 입하(立夏)!! 공원 나무들도 연두에서 초록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이팝나무는 새순이 얼마 전에야 나왔는데 꽃도 곧 필 것 같아요. 입하에는 쑥버무리를 먹는대요. ‘절기(節氣) 물속깊이님’은 알고 계셨나요. 우리 공원과 안양천에서도 쑥 캐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를 볼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쑥으로 국을 끓였을까요, 전을 부쳤을까요, 떡을 했을까요. 저는 함평 떡집에서 쑥 인절미를 택배로 받아 냉동실에 착착 쌓아두었는데 쑥떡 좋아하면 연락하세요. 봄에는 도다리쑥국, 쑥떡, 엄나무 순을 챙겨 먹곤 해요. 도다리쑥국은 코로나로 내년으로 미뤘지만, 쑥떡과 엄나무 순과 친구가 알려준 가죽나물도 맛나니까 봄이 간다고 서운할 일도 없네요. 여름을 기쁘게 맞이해야겠습니다. 


아, 자랑할 일이 있어요. 김연수 작가님 책이 스물한 권이 됐습니다. 수수꽃다리 향과 바람이 좋은 선유도에서 친구 만나고 집에 오는 버스를 탔는데 ‘우리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좋은 쪽을 선택할 수 있다’라는 김연수 작가님 말씀(글)이 생각났어요. 친구 만난 기쁨과 작가님 생각에 편안하니 좋았어요. 그 밤, 알라딘 온라인 중고를 뒤적여 최상을 골라 여섯 권을 주문했죠. 작가님 책이 차지한 책장 한 칸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데, 지금은 작가님 책 중에 가장 얇고 노랑 표지가 눈에 띄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달팽이 걸음보다 조금 빠르게 읽고 있어요. 작가님 책이야 중고로 내다 팔 일이 없으니 리스본 연필로 낯선 낱말이나 마음에 드는 문장에 줄을 긋고 공원에서 만난 이파리와 커피 컵도 그려 넣다가 겹벚꽃처럼 마음을 흔드는 문장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47쪽) 어렵지 않은 문장을 여러 번 읽었어요. 모든 게 끝나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사랑의 결실이라는 결혼도 혼자 힘으로 구지레한 과정을 거치며 나를 알아가는 것이 삶이구나 싶어서요. 사랑이든 삶이든 빛날 때보다 구지레할 때가 많은 것 같아서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없다면 또 어떤 방법으로 제가 철이 들까 싶네요. 


방금, 서점 리스본 5월 비밀책이 왔는데 편지 끝내고 열어보려고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두근두근). 물속깊이님, 장미와 수국과 아카시아와 감나무에 꽃이 피는 5월에도 편안하세요. 2022년 잎새달 28일. 마롱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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