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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May 04. 2022

우정편지] 마롱님께 물속깊이

- 2022. 5. 1. 물속깊이의 열 세번째 편지 

오랜만이라는 말도 염치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해야겠지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마롱님. 삼 월 들어 매일 글쓰기 클럽을 한 달만 쉬자고 마음 먹으면서 대신 편지는 부지런히 쓰리라 다짐했었는데 말이죠. 다짐이 무색하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질 못했네요. 서운타는 말 대신 편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성실한 친구는 이렇게 또 배웁니다.


경칩 지나 춘분 건너 청명과 곡우까지, 어김없는 절기들이 타박타박 계절을 건너는 동안 저는 무얼 하느라 그리 바빴던 걸까요. 네, 물론 노느라 바빴습니다만 꼭 그렇다고 하기엔 억울하기도 한 걸 보면 역시 핑계 없는 무덤은 없나 봅니다. 아무도 제게 글 써라 편지 써라 강요한 적 없건마는, 이상하게도 저는 숙제를 미루고 노는 초등학생 같았어요. 뽈뽈 신나게 쏘다니다가도 문득 돌아보고 또 돌아봤으니까요. 제게 글쓰기란 대체 뭘까요. 


코로나가 마롱님께도 들렀었군요. 증세도 걱정이지만 격리 기간 동안 산책도 운동도 못 하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덜컥합니다. 지금은 좀 어떠신지요. 쑥 인절미를 냉동실에 착착 정리해 두셨다는 문장에 괜찮으시겠지 싶다가도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신 건 아닌지 역시 걱정이 됩니다. 하루씩 더 나아지시기를 이렇게나마 빌어 보아요.


딱 한 달만 쉬려던 글쓰기를 은근슬쩍 사 월까지 쉬면서 내심 그래도 읽기는 많이 읽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어요. 마롱님이 편지에도 써주셨듯 인생이란 영 뜻대로 되질 않네요. 두 달 동안 뭘 했으냐 물으시면 역시, 놀았다고 답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책 몇 권을 만났어요. 더딘 읽기에 마중물이 되어줬던 건 문태준 작가님의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인데요. 여기저기 귀퉁이를 접어둔 책은 회사에 있어 메모장에 옮겨둔 문장을 소개할까 합니다.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라는 구절을 오래 들여다보던 때가 있었어요. 출근길 9호선에서였는데요. 읽자마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싶더니만 누구도 주지 못했던 고요가 단박에 곁에 와 앉더라고요. 아마 많이도 지쳐있었나 봅니다.


“홀로 단순한 시간에 오두막처럼 앉고” 밑으로 이런 문장도 보이네요. 여린 연두의 시간, 6시 45분 한강 곁 트렌치코트는 나뿐, 나뭇가지에 걸린 독수리 연, 산책 나온 강아지 춉춉춉 신난 발소리, 에스컬레이터 앞 맨발의 여자 손에는 아아. 단박에 고요를 데려온 문장과는 확연히 다른 결이지요? 제가 썼거든요 하하. 길을 걷다, 출근을 하다, 아직은 색깔 없는 순간이지만 언젠가 저마다의 빛깔을 품은 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잡아둔 한때들이 이렇게 남아 있네요.


이런 한때는 어떤가요. 청명 무렵, 하릴없이 걷던 날이었어요. 누가 부르는 것 같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꽃이 있었어요. 꽃이, 폐교 안에서, 홀로 환했어요. 누구 보라고 저리 예쁘게 피었나 생각하다 깜짝 놀랐지요. 꽃이, 누구 보라고 핀 건 아닐 테니까요. 보거나 말거나 저 혼자 충분히 환한 꽃은 목련이었어요. 어찌나 예쁘던지 한참 바라봤네요. 마음을 꽝 부딪혔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고요. 누가 보지 않아도 저 혼자 어여쁜 목련 위로 하얀 한글창을 떠올렸다면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목련은 여전히 환합니다. 제게, 글쓰기는 대체 뭘까요.


요 며칠은 인디언의 말에 마음을 내줬습니다. 책에도 시절인연이 있다고 하잖아요. <딸기 따러 가자>(정은귀)는 바로 지금 만나 더 좋은 책이었어요. 출근길에 조금, 잠들기 전에 살짝 들춰보는 인디언의 말은 멀고도 가깝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것 같으면, 넌 무얼 할 거니?”

“그럼 딸기 따러 가는 거야.”


인디언들에게 오 월은 “구멍에다 씨앗 심는 달”이자 “기다리는 달”, 그리고 “딸기 따는 달”입니다. 제게 오 월은 여린 연두가 초록으로 가는 달, 아카시아 향에 걸음이 느려지는 달, 무엇이든 다시 시작해도 좋은 달이고요. 오 월의 첫날, 바람이 심통을 부리네요. 사실 이 편지는 빨간 벽돌 카페 바깥 자리에서 쓰고 있거든요.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빨래를 개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하고 무엇보다 글을 써야 하니까요. 누가 보지 않아도 저 혼자 환한 글을, 오늘은 쓸 수 있을까요. 뭐든 시작하기 좋은 오 월의 힘을 한번 믿어 볼까요.


2022년 5월 첫날에 물속깊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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