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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리스본 Jul 04. 2022

우정편지] 마롱님께 물속깊이로부터

- 2022. 5. 29


지난 수요일에는 잘 들어가셨나요, 마롱님. 매일 글쓰기의 오프라인 모임이 있던 밤, 비가 내려 더 기억에 남을 밤이 꿈인 듯 아닌 듯 아득하네요. 몇 년을 혹은 몇 달을 까만 화면 속 목소리로만 만나다가 얼굴을 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신기한 일이더라고요. 반 이상은 마스크로 가린 얼굴일지라도요. 안녕하세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어 마스크 속으로 소리 내 웃었어요. 웃을 일 없는 요즘이라 그 또한 참 고마웠네요.


저는 꽤 일찍 도착했더랬어요. 책 한 권과 맥주 한 병을 들고 리스본 마당을 서성이다 2층으로 올라갔어요. 비님이 오셨거든요. 아무도 없는 리스본 2층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렸네요. 해가 길어 사위는 아직 밝은데, 저녁은 분명 오고 있는 이상한 시간. 연남동 초록을 눈으로 더듬으며 그렇게 앉아 있었지요. 시간이 멈춘듯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제 바람이었지 싶어요. 통 시간관념이 없어진 날들을 살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나사가 빠진 것 같은데, 끼워야 할 나사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부러 찾고 싶지는 않은 걸까요. 도통 물음표투성이인 날들 속에서도 시간은 잘도 갑니다.


빗소리, 바람소리, 문우님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마롱님 편지를 떠올렸어요. 글쓰기를 통해 “제 마음을 살피고 또는 보듬고, 저와 주변을 받아들이는 힘이 생기기를 바랄 뿐”이라는 문장이요.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을까 싶지만, 어쩐지 요즘의 제게 더욱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어서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노란 불빛 아래서 쓰는 날들에 대해 마음을 나누는 우리가, 어쩐지 애틋했어요. 아마도 같은 마음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믿기 힘든 현실을 마주했든 꿈 같은 봄밤을 보냈든 속사정은 상관 없이 출근을 합니다. 아, 얼마 전부터 출근 시간이 바뀌었어요. 한 시간 빨리 출근해서 한 시간 일찍 퇴근하고 있어요. 한달 즈음 되어 가는데 아직도 적응 중입니다. 한껏 수그린 채 작은 방을 나서는, 작고 작은 저를 요즘은 빨간 장미가 맞아줍니다. 담벼락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저를 기다리고 있다가 여어, 하며 아는 척을 해와요. 하이파이브라도 해주고 싶지만 눈으로만 흘끗 보고 말아요. 애먼 장미에게 괜한 심통인 거죠. 장미를 지나치면 맞은편에 커피집이 보여요. 출근 시간이 바뀐 뒤로는 열려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오픈 시간보다 제가 먼저 출근하니까요. 왼쪽 모퉁이엔 편의점이 있는데요. 며칠 뚱땅뚱땅 공사를 하더니 이마트24에서 GS편의점으로 바뀌었어요. 문을 열고 누군가 나오네요. 아, 낯이 익어요. 브랜드는 바뀌었지만, 주인은 그대로인가 봐요. 지하철역까지는 느릿한 제 걸음으로 8분 정도, 마주 오는 사람, 저를 앞서가는 사람, 발끝에 킁킁 코를 대 오는 강아지들.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바라보면서 걷습니다. 그런 저를 보며 그들을 무슨 생각을 할까요. 무표정하게, 어쩌면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수심 가득한 얼굴을 지나치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저는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생각이란 걸 해요. 팀장은 또 무슨 일을 벌이려나. 점심은 뭘 먹지. 어젠 여름 같았는데 오늘도 그럴까. 결국 지나갈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도 합니다. 편의점이 바뀌었네. 초록이 더 짙어졌네. 다 변하는 걸까, 하고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 사이로 오 월이 지나고 유 월이 오겠지요. 수시로 표정을 바꾸면서요. 어떤 표정과 마음으로 그 시간을 통과할지는 오직 저만이 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렵기도 해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출근길 이야기가 길었지요. 아무래도 나사가 하나만 빠진 게 아닌가 봅니다. 


편지에 써주신 <나의 해방일지>, 저도 보기 시작했어요. 언뜻 무거워 보여 봄이 짙어지는 동안 더 깊이 가라앉을까 부러 피하기 바빴던 작품이었는데요. 막상 보고 나니, 아, 진작 볼 걸, 진작 봤으면 무언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싶어 안타까운 마음만 커졌다는 후문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걸까요. 늘 이렇게 늦어요. 꼭 반 발짝씩이요. 사람 약오르게 말이죠. 다수가 구자경과 염미정의 추앙 이야기에 눈을 줄 때 제 안으로는 털털털 마을버스가 들어왔어요. 딱 그렇게 생긴 마을버스를 타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었거든요 저도요. 염미정 같은 표정을 하고서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그저 왔다 갔다 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몰랐어요. 그 시간들이 제게 어떤 표정을 남겼다는 걸요.


아! 툭하면 멍해지는 지금도 어떻게든 제게 표정을 남기겠네요. 이왕이면 다홍치마, 라는 뜬금없는 속담을 떠올리는 건 이렇게라도 웃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지금 이 시간간들은 어떤 무늬로 남을까요.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야 할는지 알 수 없어 조금 두렵기는 합니다만, 무엇이든 남을 걸 알기에 늦은 반 발짝이나마 떼어보려 합니다.


<청춘의 문장들>(김연수) 책머리에는 이런 문장이 있어요.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들을 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짐작했으니까.”


작가님 문장에 기대어 고백해볼까요. 이 이상한 편지는 사실, 쓰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말로 가득하다고요. 쓰지 못한 말쯤이야, 언젠가 전한 날이 있겠지요. 부질없다 해도 그렇게 믿고 싶은, 오 월의 마지막 일요일입니다. 평안하세요.


2022년 5월 29일 물속깊이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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