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날덕 Feb 01. 2024

1. 전자식 체중계란 비정해

체중 증감에 대하여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그다지 값비싼 물건도 아닌데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아 못 사는 것들이 있다. 내 경우에는 체중계가 그랬다.

안녕하세요 무라카미 씨!

저도 집에 체중계가 하나 있습니다. 산 건 아니고, 전전전 직장의 파트너사 행사에서 나눠주는 것을 술자리에서 넘겨받아 집에 두게 된 거죠. 전자식 샤오미 체중계인데 버전은 잘 모르겠습니다. 체중계에 올라가면 윗부분에 숫자가 나오고, 가운데엔 샤오미 로고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트너사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찍혀 있지요. 덕분에 어디서 받은 물건인지는 확실히 기억하도록 해 줍니다. 꽤 오래전 일이라 잠시 구글에 회사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다행히 아직 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집에 하나 있는 선물 받은 체중계에 망한 회사 이름이 쓰여 있다면 상당히 마음이 아플 것 같거든요. 특히 위에 띠로링 하고 표시되는 숫자도 제 맘을 아프게 하는데, 망한 회사 로고까지 함께 보인다면 정말 마음이 아플 것 같지 않으십니까. 아니라고요? 이런 T...


아무튼 이 체중계란 것이 독특한 녀석이라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지금 제 눈앞에 놓인 전자식 체중계란 뭐랄까 기묘한 구석이 있어요. 어렸을 때 쓰던 눈금이 달린 체중계는 이보다 더 인간적인 면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화살표가 가운데 놓여 있고 무게를 올리면 회전판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리릭 돌아가는 거죠. 그러다 이쯤이면 네 녀석의 무게겠지 싶은 곳에서 회전판이 슬몃 좌우로 흔들리다 멈춥니다. 저는 대체로 과체중인 편이었기에 멈출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대충 이 정도면 됐어 싶을 때 정확히 보지 않고 내려오는 거죠. 그럼 대충 뭐 79킬로쯤 됩니다라는 식으로 조금은 낮춰서 몸무게를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실제로는 더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뭐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정확히 모를 뿐이지, 제가 아는 선에서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 양심에도 부끄러움이 없는걸요.


그에 반해 이 전자식 체중계란 상당히 정이 없는 편입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숫자를 보여주니 마음이 상하기 쉬워요. 심지어 올라가자마자는 숫자가 꽤 높게 튀어 오르는 편입니다. 그래서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마친 선수처럼 가슴에 손을 꼭 모으고 고개를 들어, 별 하나엔 하나님과 별 두 개엔 부처님, 그리고 은하수처럼 수많은 조상님들께 어제 먹은 라면과 치킨과 맥주의 칼로리를 대신 가져가 주십사 비는 그 찰나에, 비정한 체중계는 제게 합당한 선고를 내립니다. 그럴 때면 자연의 인과율이란 여기에 있고 정의는 꼭 체중계에서만 승리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곤 하죠.  


요 몇 년 전부터 이 전자식 체중계가 지속적으로 저를 갈구는 덕분에 꾸준히 달리기도 하고 헬스장도 갑니다만, 결론적으로 숫자는 늘고만 있습니다. 인바디를 찍어보니 근육량은 느는데 지방량도 같이 느네요. 이렇게 근육돼지가 되어 가는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편안히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전자식 체중계 안에 성격 더러운 아주 조그만 난쟁이 친구들이 숨어서, 체중계에 올라온 사람을 흘끗 보고는 "아 저놈은 무겁게 생겼네. 대충 이 정도 찍어 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숫자를 표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이거 제가 어디서 들어서 떠올리는 생각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0. 안녕하세요, 무라카미 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