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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상희 Apr 11. 2024

씨, 씨, 씨를 뿌리고

꼭, 꼭, 물을 주었죠

5시, 서랍을 열어 고이 간직한 씨들을 꺼냈다. 검은 봉지 두 개에 나눠져 있었는데 열어보고는 풋 웃었다. 같은 종류의 상추씨가 두 개, 아욱씨가 두 개, 쑥갓씨가 세 개, 부추씨가 하나. 이렇게 들어 있었다. 아마도 둘 중 하나는 재작년에 샀던 걸 거다. 씨를 뿌리려고 찾다가 못 찾았겠지 싶었다. 어느 봉지에 든 것을 뿌려야 하나 하다가 뜯은 것, 적게 들은 것 순서로 뿌리기로 정한다. 오래되어 발아가 잘 되지 않으면 다시 뿌리면 되지 않겠는가.


6시, 드디어 밖이 희뿜하게 밝아온다. 마당으로 나서니 이제 막 핀 빨갛고 노란 튤립과 보랏빛 매발톱꽃이 반긴다. 매발톱꽃도 작년에 씨를 뿌렸던 건데 올해야 꽃을 보게 되었다.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생각보다 늦게 결실을 보더라도 기다리면 되니까.

이랑의 제일 끝, 검은 비닐을 치지 않은 곳에 씨를 뿌릴 예정이다. 작년에 씨를 뿌린 부추가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겨울 난 부추는 사위 안 주고 남편 준다>는 속담처럼 영양분이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조금 더 키워서 부침개를 해 먹어야겠다. 마주 보는 자리에 외롭지만 당당한 당귀가 있다. 삼겹살 먹을 때 하나씩 꺾어 먹어야겠다. 아직 씨를 손에 들고 있을 뿐이지만 벌써 입맛이 돈다. 씨를 뿌리기 전 라벤더를 괜히 휘저어 아침공기를 정화하고는 씨를 뿌린다.

흙과 충분히 섞어서 골고루 뿌린 다음 다시 살살 흙을 덮었다. 씨를 뿌리고 나면 꼭 개미들이 잔치를 벌인다. 조금씩이야 나눠먹는다지만, 일개 부대가 줄을 서서 씨를 개미굴로 나르는 걸 보면 참 어이없다. 조금이다. 나눠가는 것을 허락하는 건.


씨를 뿌리고 작은 잡초들을 뽑고 꽃밭의 두둑을 세운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총선 결과 이야기가 한창이다. 새로운 씨를 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싹들이 제대로 잘 자랐으면 좋겠다. 느끼함을 잡아주는 상추인 줄 알고 심었는데 잡초가 싹을 틔우는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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