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링의 경제학: 게임 아이템이 알려준 화폐의 비밀

디아블로 2에서 비트코인까지 - 화폐, 희소성, 그리고 인간행동의 철학

by 신영

"조던링 OO개 윈포 삽니다"


2000년대 초반, 디아블로 2의 거래 채널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끊임없이 오갔다. 채팅창에는 "샤코 구함", "에테 툼리버 팝니다", "조던링 O개에 윈드포스 팝니다."과 같은 암호 같은 약어들이 빠른 속도로 흘러갔고, 플레이어들은 분주하게 서버를 드나들며 거래를 성사시켰다.


제작사 블리자드는 게임 내 '골드'라는 공식 화폐 시스템을 구현했지만, 플레이어들은 자발적으로 '조던의 돌(Stone of Jordan) 반지', 즉 조던링을 화폐로 선택했다. 개발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왜 사람들은 가상 세계에서 이미 존재하는 화폐를 버리고, 특정 아이템을 새로운 화폐로 채택했을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화폐의 본질은 무엇일까?


디아블로 2 조던링 경제의 탄생

모든 스킬 +1, 마나 +20%의 효과를 지닌 조던링은 디아블로 2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템이 되었다.

디아블로 2의 공식 화폐인 골드는 설계상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골드가 드롭되어, 게임 내 경제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화폐가 유입되었다. 특히 높은 난이도로 게임을 플레이할수록 더 많은 골드가 생성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끊임없이 생성되는 골드에 비해 게임 내에서 골드를 소비할 '골드 싱크(gold sink)'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디아블로 2 초기 버전에서 골드 소모처는 주로 상점에서의 아이템 구매, 아이템 수리, 용병 고용과 부활 정도였다. 그러나 게임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기본적인 소모처는 플레이어들이 생성하는 골드의 양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더욱이 디아블로 2는 플레이어가 소지할 수 있는 골드의 최대량을 제한했다. 캐릭터 인벤토리와 개인 창고에는 보관할 수 있는 한도에 도달하면 더 이상 소지가 불가능했다. 캐릭터 레벨이 올라갈수록 이 한도는 고급 아이템의 실제 가치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상급 유니크 아이템이나 세트 아이템은 그 가치가 수백만 골드를 훨씬 넘어섰지만, 플레이어는 이를 골드로 거래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과 상황을 상상해 보자 (시세와 조던링 개수는 예시이다.)

레벨 75 소서리스 캐릭터를 플레이하던 당신은 헬 난이도 메피스토를 처치한 후 최고급 아이템인 '윈드포스' 활을 획득했다. 활은 아마존 직업에게 적합한 무기로, 소서리스에게는 쓸모가 없다. 당신은 이 아이템을 판매하여 현금화한 후 자신의 캐릭터에게 필요한 다른 장비를 구입하고 싶다.

거래 채널에서 알아본 윈드포스의 시세는 약 2000만 골드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보유한 골드는 최대치인 350만 골드이다. 현실적으로 2000만 골드를 소지할 방법이 없기에, 한 번에 이런 가치의 아이템 교환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거래 채널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발견했다. "윈포 삼 - 조던링 20개". 한 플레이어가 윈드포스를 조던링 20개에 구매하겠다는 제안이었다.

당신은 제안을 수락했다. 윈드포스를 조던링 20개와 교환했고, 이를 통해 나중에 소서리스에게 필요한 아뮬렛과 같은 다른 고급 아이템을 구매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상황은 디아블로 2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매일같이 벌어졌다. 골드의 실질적 한계로 인해, 거래 채널에서는 조던링의 단위로 고가 아이템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표준이 되었다. "이 아이템은 조던링 10개짜리야", "이 방어구는 조던링 15개 가치가 있어" 같은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었고, 커뮤니티 내에서 암묵적인 가격표가 형성되었다.


당시 디아블로 2는 오늘날 많은 게임에서 볼 수 있는 공식 경매장 시스템을 갖추지 않았다. 플레이어 간 거래는 전적으로 게임 내 거래 채널이나 직접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다. "팜", "삼", "조던링", "윈포", "에테" 같은 약어들과 숫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이런 거래 시스템에 초기에는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대안적 화폐를 찾기 시작했다. 조던링은 이러한 시스템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완벽한 대체 화폐의 조건을 세 가지를 갖추고 있었다.


첫째, 희소성이 보장되었다.

조던링은 게임의 모든 난이도에서 드롭될 수 있었지만, 특히 악몽(Nightmare) 난이도의 안다리엘이 퀘스트 드롭 버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높은 확률로 이 아이템을 드롭했다. 이 때문에 많은 플레이어들이 이 보스만 반복해서 사냥하는 '안다리엘 런'을 통해 조던링을 파밍했다. 또한 '실로스펜(Silospen)'과 같은 서드파티 드롭 계산기 프로그램을 통해 플레이어들은 특정 보스와 마법 몬스터로부터 조던링을 얻을 확률을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런 예측 가능한 드롭 패턴은 조던링이 안정적인 화폐로 기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던링 경제의 원천, 악몽 난이도의 안다리엘은 수십만 명의 플레이어들이 수없이 도전한 '금융의 여신'이 되었다.

둘째, 보편적 효용성을 가졌다.

조던링은 디아블로 2의 모든 캐릭터 직업에 두루 유용한 능력치를 제공했다. '모든 스킬 +1'은 어떤 빌드를 선택하든 캐릭터의 전투력을 직접적으로 향상시켰고, '마나 20% 증가'는 마법 사용 직업뿐만 아니라 특수 기술을 사용하는 전사형 캐릭터에게도 중요한 보너스였다. 다른 유니크 아이템들이 특정 직업이나 빌드에만 유용했던 것과 달리, 조던링은 모든 캐릭터가 자신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착용하거나 보관할 가치가 있는 보편적 아이템이었다. 이런 범용성은 조던링이 공통된 가치 기준으로 인정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셋째, 휴대와 저장이 용이했다.

디아블로 2의 인벤토리 시스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플레이어의 기본 인벤토리는 10x4 격자(총 40칸)에 불과했고, 게임 내 아이템들은 크기에 따라 여러 칸을 차지했다. 예를 들어 양손검은 2x3(6칸), 갑옷은 2x3(6칸), 헬멧은 2x2(4칸)의 공간을 차지했다. 창고 역시 6x8(48칸)로 제한되어 있어 공간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던링은 1x1 공간만 차지해 인벤토리 효율성이 탁월했다. 이는 디아블로 2의 거래에서 중요한 물류적 이점을 제공했고, 대량 거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멀티플레이어 게임에서 캐릭터 간에 아이템을 빠르게 이전하는 데도 용이했다.


그러나 일부 플레이어들은 조던링이 화폐로 채택된 후 아이템을 불법적으로 복제하여 시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후에 게임 경제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블리자드가 공식적으로 대응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되었다.


화폐의 본질에 대한 통찰

조던링의 사례는 화폐의 본질적 기능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경제학에서 화폐는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수행한다. 교환의 매개체, 가치의 저장 수단, 회계의 단위로서의 역할이다. 조던링은 이 세 가지 기능을 모두 충실히 수행했다.


무엇보다 이 현상이 유저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어떤 중앙 당국이나 개발자의 개입도 없이,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화폐를 '발견'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한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 개념의 완벽한 예시다. 하이에크는 복잡한 사회 시스템이 중앙의 계획 없이도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연스럽게 질서를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현상은 또한 화폐의 가치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던링은 그 자체로는 단지 게임 속 픽셀로 구현된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플레이어들이 그것에 가치가 있다고 합의했기 때문에 실제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현실 세계의 화폐도 마찬가지다. 금이나 지폐, 디지털 숫자는 우리가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


글의 서두에 예시로 든 게임 내 거래 채널을 다시 보자. "조던링 구함", "에테 툼리버 팜", "조던링 O개에 샤코 " 같은 약어로 가득 찬 채팅은 마치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 현장을 연상시켰다. 이런 환경은 디아블로 2의 거래가 단순한 게임 내 활동을 넘어, 현실 경제의 모습을 반영하는 진지한 경제 활동이었음을 보여준다. 플레이어들은 자연스럽게 실제 금융 시장에서 볼 수 있는 행동 양식을 발전시켰고, 이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모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화폐는 계획되는 것인가, 발견되는 것인가?

조던링의 사례는 화폐의 기원에 대한 오래된 경제학적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화폐는 국가나 권위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교환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것일까?

조개껍질과 소금은 자연발생적 화폐의 사례인 반면, 고대 그리스 주화는 도시국가가 발행한 공식 화폐로,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화폐의 기본 기능을 수행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최초의 화폐들은 대부분 자연 발생적이었다. 조개껍질, 소금, 가축 등 다양한 물건들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화폐로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는 미크로네시아의 야프 섬에서 사용된 '라이(Rai)'라는 거대한 돌 화폐다. 밀턴 프리드먼이 '화폐경제학'(2024)에서 상세히 분석했듯이 이 돌 화폐들은 너무 무거워서 실제로 옮기기 어려웠지만, 섬 주민들은 단지 소유권만 구두로 이전하며 거래에 사용했다. 심지어 바다에 가라앉은 돌이 존재한다는 집단적 인식만으로 계속 화폐로 기능했다. 이는 화폐의 가치가 물리적 실체보다 사회적 합의에 더 크게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다. 특히 금(Gold)과 은(Silver)은 희소성, 내구성, 분할 가능성 등의 특성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보편적 화폐로 자리 잡았다. 조던링이 디아블로 2에서 화폐로 선택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화폐는 점차 국가의 독점적 발행물이 되었다. 20세기 초 많은 국가들은 대공황 시기를 거치면서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1944년 설립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미국 달러를 금에 고정(당시 1온스당 35달러)하고 다른 국가들의 통화는 달러에 고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나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달러와 금의 태환성을 중단하는 '닉슨 쇼크'를 발표하면서 이 체제도 붕괴되었다. 이후 세계 화폐 시스템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고, 대부분의 국가 화폐는 금과 같은 실물 자산이 아닌 정부의 신뢰에 기반하는 법정화폐(Fiat money)가 되었다.

자연 발생적 화폐의 대표적 예시인 금. 희소성, 내구성, 휴대성을 갖춘 금은 사용자들의 자발적 선택으로 화폐가 되었다.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포스터.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디아블로 2의 조던링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게임 내에서는 두 가지 화폐 시스템이 공존했다. 하나는 개발사가 설계한 '계획 경제'의 골드, 다른 하나는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자생적 경제'의 조던링이다. 결과적으로 자생적 시스템이 더 효율적이었고 광범위하게 채택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던링 경제도 완벽하게 유지되지 못했다. 후기에는 복제 버그와 다양한 해킹으로 인해 조던링이 과도하게 유통되면서 그 가치가 하락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블리자드의 공식 패치 노트(Patch 1.10, 2003년 10월)에서는 "아이템 복제 방지 시스템을 개선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게임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블리자드 개발자 맷 하우스홀더(Matt Householder)는 배틀넷 포럼에서 "아이템 복제는 게임 경험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결국 디아블로 2의 1.10 패치 이후에는 고급 룬(High Runes)이 새로운 기축 통화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조드(Zod)' 룬과 같은 극도로 희귀한 아이템이 가치 저장 수단으로 선호되었다. 이런 고급 룬은 드롭 확률이 1/100,000 이하로 설정되어 있었고, 게임 내 '룬워드(Runeword)' 시스템의 핵심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화폐 시스템의 진화는 신뢰와 희소성이 화폐의 핵심 가치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게임 속 중앙은행: 개발사의 딜레마

게임 개발사들은 종종 현실 세계의 중앙은행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들은 게임 내 경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 공급량을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며, 때로는 직접적인 시장 개입을 하기도 한다.


블리자드 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게임 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골드 싱크 시스템 구현했다. 고가의 탈것, 수리 비용, 경매장 수수료 등은 모두 경제에서 골드를 제거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5년이 넘는 서비스 기간 동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골드는 지속적인 가치 하락을 경험했다. 이브 온라인의 개발사 CCP 게임즈는 2007년에 실제 경제학자 에이올푸르 구드문드손을 고용해 게임 내 경제를 관리했다. 이브 온라인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은 실제 경제학 연구의 대상이 될 만큼 정교했다.


이러한 개발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들은 종종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경제 시스템을 활용하거나 우회한다는 것이다. 디아블로 2의 조던링 화폐 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는 중앙 계획 경제가 직면하는 근본적인 도전을 보여준다. 아무리 정교한 계획도 수많은 개인의 분산된 지식과 행동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 경제에 던지는 화폐의 교훈

게임 속 화폐 현상은 현실 경제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화폐 시스템은 계속 진화해 왔다. 금본위제가 폐기되고 법정화폐 시스템으로 전환된 20세기의 변화 이후에도, 화폐는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형태의 자생적 화폐가 등장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09년 등장한 비트코인은 많은 면에서 디아블로 2의 조던링 현상과 유사하다. 비트코인은 중앙 당국 없이 탄생했으며, 제한된 공급량(2,100만 개)을 가지고 있고, 사용자들의 신뢰와 합의에 기반하여 가치를 유지한다. 또한 비트코인은 조던링처럼 희소성, 이동성, 분할 가능성이라는 전통적인 화폐의 특성을 디지털 형태로 구현했다.

2009년 등장한 비트코인은 사용자들의 합의에 기반한 가치를 지니며, 중앙 권위 없이 작동하는 디지털 화폐 시스템을 구현했다.


이후 등장한 이더리움, 솔라나와 같은 암호화폐들은 비트코인의 개념을 확장하여 스마트 계약,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 등의 기능을 추가했다. 이는 마치 디아블로 2에서 조던링 경제가 발전한 후 다양한 온라인 게임에서 더 정교한 가상 경제 시스템이 개발된 것과 유사한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


19세기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부를 찾아 몰려들었듯이, 비트코인 채굴자들은 컴퓨팅 파워를 투자해 암호화폐를 획득하려 경쟁한다. 앞서 언급한 '안다리엘 런(일명 안다런)'이라 불리는 활동에 전념하는 플레이어들은 비트코인의 채굴자와 흥미로운 유사점을 보인다.


이들은 악몽 난이도의 안다리엘 보스만을 반복적으로 사냥하며 조던링을 파밍했다. 한 게임 세션에서 안다리엘을 처치한 후, 게임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보스전을 반복하는 행위를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지속했다. 이는 마치 비트코인 채굴자들이 블록 해시를 찾기 위해 계산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과 같은 패턴이다. 헌신적인 플레이어들은 장시간을 오직 조던링 획득을 위한 안다리엘 런에만 투자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플레이어들은 비공식 맵핵(Map Hack) 프로그램을 사용해 안다리엘까지의 경로를 빠르게 찾거나, 게임 봇(Bot) 프로그램으로 이 과정을 효율화하려 했다. 이는 오늘날 비트코인 채굴자들이 더 효율적인 채굴 장비와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것과 닮아 있다. 두 경우 모두 희소성 있는 디지털 자산의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하며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는 행동 패턴을 보여준다.


또한 조던링 파밍과 비트코인 채굴 모두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열정적인 참여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그 가치가 널리 인정받으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채굴의 난이도'가 높아졌다. 이런 역학 관계는 19세기 골드 러시, 디아블로 2의 조던링 경제, 그리고 현대의 암호화폐 채굴에 이르기까지 희소한 자원을 둘러싼 인간 행동의 본질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물론 비트코인과 조던링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비트코인은 처음부터 화폐로 설계된 것이고, 블록체인이라는 혁신적 기술에 기반하며, 게임 내 아이템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둘 다 기존 화폐 시스템의 한계에 대한 자발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게임 경제와 현실 경제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은 화폐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조던링이 복제 버그로 인해 가치가 하락했듯이, 지나친 통화 발행이나 신뢰 상실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현실 화폐 시스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준다. 베네수엘라나 짐바브웨의 초인플레이션 사례는 화폐 가치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디아블로 2의 골드처럼 인플레이션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비트코인과 같은 탈중앙화 화폐는 희소성과 공급 제한을 강조하는데, 이는 디아블로 2 플레이어들이 조던링을 선택했던 이유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디아블로 2를 통해 들여다본 화폐의 본질: 게임과 현실의 경계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화폐란 금과 같은 물리적 실체에 기반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화폐는 이미 은행 계좌의 디지털 숫자에 불과하며 실물 화폐(지폐와 동전)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미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진 세계에 살고 있다. 현실에서 번 돈으로 게임 속 아이템을 구매하고, 일부는 게임 활동을 통해 현실의 생계를 유지한다. 수백만 원에 거래되는 게임 아이템, 가상 세계의 부동산, 디지털 예술품은 더 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니다.


게임 속 화폐 현상, 특히 디아블로 2의 조던링 경제는 화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화폐를 화폐로 만드는가? 단순한 합의만으로 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가?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실제'와 '가상'의 경계는 어디인가?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화폐의 객관적 교환가치는 결국 그것의 주관적 사용가치에서 기인한다." 조던링의 사례는 이 원리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픽셀로 이루어진 가상의 반지가 실질적인 경제적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사용자들이 그것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화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잘 작동한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 통찰은 화폐의 역설적 특성을 정확히 짚어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화폐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게임 속 화폐 현상은 이 당연시되던 화폐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한다.

"화폐는 중앙의 계획 없이도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 하이에크의 통찰은 디아블로 2의 조던링 경제에서 현실로 구현되었다.

더 근본적으로, 화폐는 인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지적했듯이, 화폐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다. 디아블로 2 플레이어들이 자발적으로 조던링 경제를 구축한 과정은, 인류가 수천 년 전 처음으로 화폐 시스템을 발전시킨 과정과 유사하다.


게임 속 화폐 현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가치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창조된다는 것, 경제 시스템은 아무리 복잡해도 결국 인간의 신뢰와 합의에 기반한다는 것, 그리고 디지털과 물리적 세계의 경계는 생각보다 훨씬 모호하다는 것이다.


디아블로 2의 플레이어들은 그저 게임을 즐기고 있었을 뿐이지만, 그들은 동시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사회적 기술 중 하나인 화폐의 본질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가상의 사례는 화폐와 가치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경제 시스템도 더 큰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복잡한 게임일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 O'Brien, N. Skins, Chips, and Stone of Jordans: Searching for the Value of Emergent Video Game Economies. (2016).

- Patch 1.10 (Diablo II). Diablo Wiki. (2003).

- Hayek, F. A. <Denationalisation of Money: The Argument Refined>.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1978).

- 루트비히 폰 미제스. <화폐와 신용의 이론>. 김이석(역). 한국경제연구원 (2011).

- 밀턴 프리드먼. <화폐경제학>. 김병주(역). 한국경제신문 (2024).

- 배리 아이켄그린. <글로벌라이징 캐피털>. 강명세(역). 미지북스 (2010).

- Nakamoto, S. <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 Bitcoin.org. (2008).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조현욱(역). 김영사 (2015).



<이미지 출처>

https://rhizome.org/editorial/2016/dec/14/searching-for-the-value-of-video-game-economies/ by Nicholas O'Brien

http://pc.gamespy.com/pc/diablo-ii/guide/page_2.html

https://timelessmoon.getarchive.net/amp/media/sea-shell-clam-travel-vacation-ce3ab8 by pixabay.com

https://pxhere.com/ko/photo/1615585 by pxhere

https://www.worldhistory.org/Greek_Coinage/ by Mark Cartwright

https://www.flickr.com/photos/glenda_gilreath/42442618452 by Glenda Gilreath

https://cryptodnes.bg/en/is-bitcoin-currently-in-a-bubble/ by Kosta Gushterov

https://mises.org/library/book/denationalisation-money-argument-refined by Mises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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