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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쉐퍼드 Jun 16. 2018

2002년 6월 vs. 2018년 6월

16년차 결혼기념일에 16년 전 나에게 하고픈 말..

2002년 6월 14일,

조짐은 조금씩 꿈틀댔습니다.

폴란드, 미국을 넘어

이제 포르투갈의 벽만 깨면 

월드컵 사상 최초 한국의 16강 진출.


그리고 그림처럼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 왼발로 결승골을 낸 그. 

2002년 월드컵 당시, 박지성 골 세러모니


축구의 ㅊ도 모르는 제가 이 상황을 기억하는 것은

워낙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날이 바로 제 한 번 밖에 없었던(?) 

결혼식 이어 서기도 합니다. 


네.. 드라마 대사로도 나중에 나오는

바로 그 센스 없고 축구 모르는

월드컵 경기 날 결혼식을 잡은 그 사람입니다.

응답하라 1994, 사진출처:SBS CNBC

8강전 때는 아니었으니 드라마보단 조금 나은 걸까요?


암튼 금요일 5시 예식을 경기 시작 전에 끝내려

결혼식 진행 스텝들이 초스피드로 일하고,

하객들은 어디서 경기를 볼지만 초미의 관심사

결혼식 사진엔 붉은 악마 티도 여럿 보입니다.

첫날밤 마포의 한 호텔 밖으로 오늘을 잊지 말라

밤새 새벽까지 끊임없이 들리던 환호와 경적.. 


완벽하게 월드컵이 주인공이던 나의 결혼식.

아쉽기도 했지만 이렇게 오랜 추억으로 남았네요. 




2018년 6월 14일


흔한 영화처럼 과거로 돌아가 스물몇의 나에게 

한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 뭐라 할까요? 


정신 단단히 차리라고 결혼은 생각보다 어렵다고?

지금 옆에 있는 그 남자 온전히 믿지 말라고?

전셋집으로 있던 서울의 그 조그만 아파트는

3배가 오를 것이니 무슨 빚을 내서라도 꼭 사라고?

삼성전자나 몇몇 주식 사놓는 것도 잊지 말라고?

미국 유학가면 전과자로 오해 사니 조심하라고?


아니면..

조산 후 인큐베이터 들어가 애간장을 태우던 아들

살이 너무 쪄 다이어트를 고민할 날이 온다고

여행과 맛집을 가장 좋아하시던 어머니 

요양원 가셔서 휠체어에 의지 하시는 날이 온다고

눈물을 흘리며 내 선택을 후회하던 유학

졸업시험 통과하고 무사히 돌아올 날이 온다고

남편 사업 승승장구해 부러웠던 그 언니

어린 아들 두고 하늘나라 가는 날이 온다고


이런 말, 저런 말하고 싶다가 

말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네요.

 

그래도 꼭 한 마디 해 줄 수 있다면

이제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

기쁨, 쾌락, 성취, 고통, 슬픔, 우울

아무리 영원할 것 같아도 다 지나간다고

그러니 너무 많이 웃지도 울지도 말라고


아니, 

그보다는 

아이처럼 실컷 울고 실컷 웃으라고


처음 찌개를 끓이고, 

처음 아이를 낳고, 

처음 학교에 보내고, 

처음 차를 사고, 

처음 집을 사고, 

처음 경력 단절을 벗어나고,

수많은 처음들을 매일매일 쌓아 올리며 

오늘 처음 이 땅에 태어난 아이처럼 살라고


삶의 모든 순간을 할 수 있는 한 감사하라고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이 모든 건 할 수 있는 한이니 

감사와 사랑 또한 너무 하려고 애쓰지는 말라고



지난 16년 간 헤아릴 수 없는 다림질이었지만, 

TV 보면서 결혼기념일에 하는 것은 처음인 오늘,

구겨진 가족의 옷가지 구석구석을 다리는 일이

그 어떤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오늘, 

오늘에서야 알겠네요. 

오늘은 처음이란걸


잘 살았고,

잘 살고 있고,

잘 살 거야. 

16년 전의 나,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 전해봅니다.


Be the reds again and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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