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5공 청문회 vs. 2016 국정농단 청문회
2018년 2월 마지막 밤,
오늘 저녁을 먹고 초등학생인 두 아들들과 Dixit이라는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렇게 생긴 카드게임인데요.
게임 참가자는 모두 석 장의 카드를 손에 들고 술래는 자신이 뽑은 카드 하나에 대해 스토리텔링을 합니다. 문장, 표현, 노래(이건 저희 집 규칙) 뭐 자유롭게요. 그러고 자신의 카드를 뒤집어 내려놓으면 일제히 열어보어 과연 그중에 스토리텔러가 말한 카드는 어떤 것이었을지 맞추는 게임입니다.
암튼 그 게임을 한참 재미나게 하고 있는데, 술래인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면서 가수 이용의 노래를 부릅니다.)
저는 뭘까 약간 고민하다가 멜랑꼴리 하면서 뭔가 감성적인 촛불 그림을 내려놓았죠.
과연 아들은 어떤 감성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고른 걸까 궁금했는데,
아이의 그림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알 수가 없어서 "이게 뭘 뜻하는 거니?" 했더니,
"모르시겠어요. 2016년 10월 31일이요.."
그래도 저는 기억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자 아이는 드디어 정답을 말해줬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2mS-vNy_A0
바로 이 사건을 이야기한 것이에요.
꼭두각시처럼 사람을 조정하는 그 비선 실세에 대한 기억이 그 해 겨울 내내 우리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
저는 그 후에도 워낙 사는 게 바쁘고 내 앞에 벌어지는 일도 다이내믹한지라 어느새 잊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보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마음에 더 강하게 새겨졌는지 아이의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이게 떠오르나 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핵심이 비선 실세란 사실도요.
어쩌면 정치적인 사건에 아이들이 의견을 낼 때 우리는 "니까지 것이 뭘 안 나고"인 건 아닌지 몰라요.
제가 어릴 때도 그랬는지. 그러고 보니 청문회가 국회법에 처음 신설된 것은 1988년입니다.
그 해 11월 4일부터 시작된 청문회는 TV로 생중계가 되었었죠. 당시 제 일기에도 남아있네요.
88.12.6 (화) 모두 한심하다
TV에선 청문회 중계방송, 어른들의 대화는 청문회뿐 청문회의 진짜 뜻은 모르는 것을 밝히고 정의를 찾는 것인데 요즘은 단순히 "남에게 보이기"식이다.
다 알고 있는 말을 증인과 국회의원이 말하고, 원래 거짓을 말하기로 작정한 증인에게 백날 대답하라고 하는 국회의원 모두 한심하다. 나라는 청문회로 떠들썩해도 소문난 잔치 먹을 것은 없다.
진실로 하는 진지한 청문회도 아닌데 뭘... 또 한 가지 전전대통령과 그 외 5 공비리 인물을 용서하자고 하다니 참을 수 없다. 그렇게 결론짓는다면 머리띠 두르고 나가 데모해보겠다. 전 전 대통령 등 재수 없는 인물들의 용서는 곧 한국의 망신살이 뻗이는 것이고, 법의 존 엄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2018 년, 살기 바쁜 중년의 아줌마인 저는 이 일기를 읽으면서 아니 뭐 이렇게 운동권(?) 어린이가 다 있지. 누가 세게 의식화 교육이라도 시켰나.. 싶을 정도로 이렇게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제 자신이 생경합니다.
뭔가 정치적인 이야기는 조심해야 하고 선거 때만 조용히 소신을 보이는 것이고 따지고 보면 다 먼지 안나는 사람도 없고 이놈도 저놈도 다 싫다 주의에 오히려 가까울지도 모르겠어요. 저의 이런 정치적 무지와 무감각이 원래 예전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든 또 하나의 생각은 나의 아이의 오늘 저 정치에 대한 관심이나 감수성도 자라면서 실망을 맛보고 또 금기시될 말들로 학습되면서 그냥 모르진 않는 선에서 중립적인 의견을 표현하는 세련됨으로 무장되어 30년쯤 흘러버린 어느 날엔 오늘 저처럼 "내가 언제 이렇게 늙은 생각을 갖게 되었지"하며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날이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내일은 3월 1일 독립기념일 태극기를 전국 방방 곡곡에 휘날리며 일제 치하에서 정의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섰던 이름없는 순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또 상당히 다른 의미의 태극기가 휘날리겠지요.
그 태극기의 메시지를 보는 저는 어떤 일기를 써야 할까요?
우리 누군가의 부모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한데 물 흐르듯 순응해야 하나요?
30년 전 초딩처럼 "한국의 망신살이고 법의 존엄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라 해야 할까요?
번외 1: 글을 쓰던 중 검색하다 본 자료
청문회에서 정주영 증인이 "나는 시류에 따라 산다"라는 답변을 하자 이에 대해 반박 질문
"시류에 순응하는 것이 힘이 있을 때는 권력에 붙고 힘이 없을 때에는 권력과 멀리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가치관의 오도를 가져오게 하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다고 보지 않습니까" (출처: 노무현 사료관)
번외 2 : 오늘의 카드 게임 중 아래의 그림을 보고는 아들은 뭐라고 설명을 했을까요?
(정답)
왼쪽 그림 "어흥 할멈을 잡아먹으러 왔다" (여자의 손이 호랑이 같아서 팥죽할멈과 호랑이가 생각났다고...)
오른쪽 그림 "안에는 없고 밖에는 있네~" (남자가 든 종이엔 글씨가 없고, 하늘엔 있어서라고...)
뭐 탄핵사건을 이야기할 때와는 또 다른, 그때그때 다른 초등학생 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