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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기여행가 Mar 31. 2022

충남 홍성에 흐르는 독립운동의 유산

지역공동체 우수모델의 뿌리, 풀무학교(홍성 1편)

충청도의 중심, 홍성

충청도하면 생각나는 도시는?이란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대전, 충주, 청주, 공주, 천안, 세종 등이 떠오를 것이다. 여기에 홍성을 말하는 이는 많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홍성의 옛 이름 홍주는 조선시대부터 충주, 청주, 공주와 함께 충청지역의 4대 목(牧)이었다. 그리고 바다와 인접한 내포지역의 중심고을로써 물류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현재는 내포신도시가 건설되고 충청남도청 소재지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홍성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기도 는데 대표적으로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있다.

그럼 언제 홍주가 홍성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1914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으로 개칭했다. 이는 만해 한용운 성생, 백야 김좌진 장군, 홍주의병 등과 같이 홍주에서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나온 것이 홍주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홍주의 기(氣)를 말살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 민족운동의 정신은 지금도 끊기지 않고 이 홍성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그 혼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 흔적을 찾아 홍성으로 떠났다.

홍주성 역사관내 옛 홍주성 모형


이승훈 선생과 오산학교

홍성과 민족운동 정신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오산학교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1907년에 민족 교육을 위해 평안북도 정주에 세운 4년제 중등 과정의 학교이다.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이승훈은 1919년 3.1절 독립선언서 작성에 기독교 측 대표로 참가했다가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일본 헌병은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를 불태워버리고 이렇게 문을 닫은 오산학교는 출감 이후 다시 세우게 된다.


현 오산중 ·고교의 전신으로, 민족 교육사에 크게 공헌하였다. 초대 교장 백이행에 이어, 1910년 교육주지(敎育主旨)를 기독교정신으로 고쳐 나부열 목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맞았으나, 그 후 사정에 의하여 기독교측과의 관계를 끊었다. 당시 교육을 맡았던 지도교사에는 여준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있었고, 운영을 맡았던 교장으로는 백이행의 뒤를 이어 이종성 ·나부열 ·박기선 ·조만식 ·유영모 ·주기용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심혈을 쏟았다. 학교 출신인 중 주요 인물로는 김소월, 김기석, 주기철 목사 등이 있다.
3 ·1운동 후 이승훈이 체포 구금되자 일제는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탄압을 강화하였고, 끝내는 교사(校舍)를 불태웠다. 1923년 출감한 이승훈이 김기홍 ·오치은 ·조시연 등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재건, 종합교육기관으로서의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30년에 이승훈의 급서(急逝)로 모든 계획이 중단되었다. 그 후 근근이 명맥만을 이어오다가 광복 후 오산의 전통과 이념을 되살리게 되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부산으로 옮겨 1953년 4월에 오산고등학교로 재건하였다. 1956년에 현재 위치인 서울 용산구 보광동(普光洞)으로 이전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오산학교 [五山學校] (두산백과)
현재의 오산중고등학교 전경(서울시 용산구 보광동/출처:오산중고등학교 홈페이지)


이찬갑 선생

이찬갑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1904년 평안북도 정주군 익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은할아버지인 이승훈이 새운 오산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학교 운영방침에 불만을 품고 중퇴한 이찬갑은 과수원과 양계장을 운영하며 농촌 운동을 했고 독립 이후 어수선한 남북한 상황 속에서 양쪽 사회 현실에 모두 실망하고 한국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민족의 살 길을 교육과 농업에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주옥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찬갑 선생(출처 : 홍성신문)


주옥로 선생

주옥로 선생(이하 존칭 생략)은 1919년 12월 24일 홍성군 송동면 팔괘리 송정마을 풀무골에서 태어났다. 풀무골에는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이 있었고 대장간에서 쇠를 불에 달굴 때 아궁이로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옥로는 감리교신학교에 졸업하여 홍동감리교회 목사로 부임받고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을 만나 무교회주의(1920년대 한국 ·일본에서 전개된 교회 혁신운동. 넓은 의미에서의 무교회주의는 조직화된 제도권 교회를 강조하여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이른바 교회주의에 반대 또는 저항하는 신앙과 신학사상)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리고 홍동에서 청년회를 결성하여 계몽운동을 펼치게 된다.

주옥로 선생(출처 : 홍성신문)


풀무학교 설립

평안북도 정주군 오산에서 청년회를 결성해 소비조합을 만들어 지역운동을 폈던 이찬갑은 무교회주의를 공부하다 월남한 이후 무교회집회를 다니시면서 주옥로를 만났다. 주옥로의 고향이 홍동이었기에 함께 홍동에 무교회주의와 농업을 기반으로 한 풀무학교를 설립하였다. 1958년 4월 23일 학생 18명, 교사 2명 그리고 학부형 몇 명이 참석한 초라한 개교식으로 시작한 풀무학교는 현재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로 이어져 대안 교육 운동의 근본 성격과 이념 지향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대표적인 대안 학교로 자리 잡고 있다.

독립운동 인재양성을 위한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 선생, 오산학교에서 공부했던 이찬갑 선생,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홍성 출신으로 청년회를 결성하여 계몽운동을 하던 주옥로 선생. 이들의 인연이 이어져 현재의 가장 우수한 대안학교로 손꼽히는 풀무학교와 가장 유명한 지역공동체인 홍동이 만들어지게 된다. 독립운동의 유산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족을 위한 마음은 같았던 이들의 정신이 지금의 풀무학교와 홍동을 만들어 낸 것 아닐까? 홍동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풀무학교 본관


'풀무학교와 홍동 지역공동체이야기'로 홍성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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