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룩말 Nov 04. 2023

주말의 명화를 살려내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사진처럼 단편적이다. 정지된 장면으로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록 사진이지만, 그 안에는 냄새, 촉감, 소리 등 공감각 정보가 고스란히 들어있어,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십 년을 뛰어넘어 어느 날 밤으로 날아간다.


  주말 밤에는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각미디어, 텔레비전에서 주말의 명화를 방영했다. MBC는 주말의 명화, KBS는 토요명화, 명화극장 등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토요일 낮에도 외화 방영하는 시간이 있어서, 토요일 국민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와서 라면을 먹으면 때맞춰 영화가 시작됐다.


  그날도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대충 라면을 먹었는지, 학교 앞에서 떡볶이로 때우고 왔는지 하여간 집에 왔다. 토요일 낮, 식구들은 없고 조용했다. 버릇처럼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영화가 이미 시작 됐길래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며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한 여자가, 매일 좋아하는 배우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여자에게는 낙이 없다. 오직 혼자 극장에 가서 그 배우의 뻔한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어느 날, 커다란 스크린에서 배우가 탈출한다. 매일 같은 연기가 반복되는 스크린 안의 삶이 지긋지긋하다며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스크린 밖의 여자와 손을 잡고 도피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배우와 여자를 쫓는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던 나는 한동안 이 영화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아는 건 영화 제목 뿐이었다. 바로 <카이로의 붉은 장미>였다. 당시엔 인터넷도 없어서 제목만으로 영화 정보를 찾지도 못했다. 제목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이 영화가 우디 앨런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디 앨런의 작품세계는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은 많지만, 그 유명세를 전혀 알지 못한 청소년에게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매력 있는 작품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문득 깨달은 것은, 이런 작품을 토요일 오후 시간대에 텔레비전에서 영해주었다는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상파 텔레비전은, 특히 우리나라의 지상파 텔레비전은 공영방송의 성격을 많이 띠고 있어서 방송콘텐츠의 큐레이션이 굉장히 믿을만하고 수준 높다는 사실이었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이, 이 영화가 영화사에서 손꼽는, 아니면 내 인생에서 손꼽을만한 위대한 명작은 아닐지라도, 어린 나의 감수성에는 마치 지진처럼 다가왔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 드라마나 음악 하나가 어린 날 우리에게 주는 감수성은 마치 벼락을 맞는 것처럼 엄청나다.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 '인생은 저런 것이구나'를 깨달으며, 예술이라는 '체험'을 하는 첫 순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코미디 장르의 대가답게 우디 앨런이 아주 매끈하게 만든 작품이지만, 과연 어느 점이 나에게 어필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냥 빨려 들었을 뿐이다. 현실과 환상, 예술 자체에 대한 예찬과 자조가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 안에 단짠단짠으로 버무려져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 대학생 때였던 듯하다. 그날도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외화를 무심코 보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에, 배우도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어떤 인내심에서였는지 조금 보고 있자니 끝까지 보게 되었고 "아니, 세상에 이런 영화가 다 있나?"라는 충격과 감탄으로 영화는 끝났다. 이 영화 뭐지? 이 감독 대체 뭐지?

  그 영화 역시 당시에는 정보가 전혀 없었고 간신히 제목만 적어놨었다. 훗날 정보를 찾아보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이제는 스타일리시한 감독의 반열에 오른 웨스 앤더슨의 장편 데뷔작 <바틀 로켓>이었다. 당시에는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었으나, 웨스 앤더슨의 <로열 테넨바움>이 국내 개봉을 하면서 그의 전작들이 겨우 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데뷔작 <바틀 로켓>은 영화 자체도, 정보도 제대로 구할 곳이 없었던 시절이다. 오직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준 그 한 번이 내가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아주 희귀한 기회였는데, 우연히 그 타이밍에 영화를 본 것이 신기하고 심지어 고맙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 명화극장 등에서 본 외화들은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다. 텔레비전 밖에는 제대로 된 문화적 통로가 없던 그 시절 어린 나에게 많은 예술적 체험을 하게 해 주었던 것이 그런 영화프로그램이었다. 극장에 자주 가기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정말 중요한 건 양질의 큐레이션이기 때문이다. 극장은 내가 영화를 선택해서 골라야 하는데, 이 선택마저도 제대로 훈련받지 않으면 '선택의 눈'을 가지기는 매우 어렵다. 인생에서 두 시간을 삭제해주는 영화들은 넘치지만, 인생에서 두 시간을 어느 시간보다 값지게 만들어주는 영화들은 진정한 '선택의 눈'이 필요하다.


  이제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내가 그 나이 또래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수많은 외화들을 떠올린다.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텔레비전만 틀면 나왔던 영화들은, 전문가들의 고민을 거쳐 세심하게 골라진 명작들이었으리라. 물론 대중적인 히트영화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다 좋다. 지금 어린 세대들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유튜브에 더 재미있는 것들이 있고, OTT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들은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눈, 즉 '큐레이션'이다.


유튜브는 우리에게 진정한 큐레이션을 제공하지 않는다. 예술을 통해 진정한 체험을 하는 것은 좋은 큐레이션 속에서 가능하다. 영화가 없거나 영화를 볼 기회가 없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영화는 너무 많다. 평생 봐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극장티켓도 웬만한 이들에게는 가능한 가격이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에게는 보편적이고 믿을 수 있는 큐레이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큐레이션은 비싸거나 특정인에게만 제공되는 것보다는, 국민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술서비스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종일 유튜브를 붙들고 사는 요즘 아이들이지만 그 안에서 접하는 콘텐츠의 질은 과연 어떨까 고민스럽다. 내가 어릴 때도 어른들은 'TV는 바보상자'라면서 TV만 보고 있으면 공부도 못하고 바보가 된다고 나무랐다. 하지만 그 바보상자 안에서 나는 당시에 쉽게 들어보지도 못할 명작들을 보는 기회를 얻었고, 그게 성인이 된 지금까지 나의 마음 한편에는 예술을 수용하는 텃밭이 되어주고 있다. 기억에 남는 영화 한 편이 씨앗을 틔워 관심있는 비디오를 대여해 보고, 그 감독과 배우의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에 가서 보고, 그러면서 나는 영화가 인생에 많은 위안과 풍요로움,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나 다 아는 명작들은 오히려 볼 기회가 많지만, 개봉작도, 앙코르 상영작도 아니라면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할 명작들은 너무나 많다. 그런 영화들을 나는 텔레비전 영화프로그램에서 많이 봤던 것 같다. 배트 미들러의 <두 여인> (The Beaches)는 지금까지도 내게 기억되는 명작이다. 이것 역시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봤다. 두 여자의 아름답고 우아한 우정이야기다.


  청소년기에는 MBC 라디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 영화학과 교수인 유지나 교수가 나와 영화를 소개해주는 '시네마 천국'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요즘은 어느 라디오프로그램이나 영화소개 코너가 다 들어가지만 유지나 교수의 코너는 영화에 대한 지식을 매우 많이 쏟아부어주던 코너라고 기억된다. 그냥 신작소개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깊이가 있었다. 그 코너를 들으면서 영화도 알고 봐야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같은 지식과 자극을 접해도, 어린 날의 성장과 어른의 성장은 속도가 다르다. 그 시대에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밤이면 라디오를 들었는데, 돈 한 푼 안 들이고 접할 수 있는 라디오를 통해 나는 영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엄청나게 습득했고, 영화뿐 아니라 예술을 보는 눈을 키워갈 수 있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 또는 '민영방송이지만 공익적 성격을 지닌 방송'에 많은 사람들이 요즘 반감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영방송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이 맞을까? 국민들의 소득과 경제적 수준이 올라갈수록 기본적인 서비스에 대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제 돈 없어서 영화 못 보는 사람이 어딨어? 하는 거다. 휴대폰만 있으면 유튜브로 다 보고, 극장도 만원이면 가는데. 즉 소득 수준이 높아졌는데도 공공 문화서비스는 오히려 뒤로 후퇴하고, 간과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공 서비스는 이럴 때일수록 더 양질의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공짜로, 제공해야 한다. 특정인들만 사볼 수 있는 고급 영화 컬렉션을 무료로 텔레비전에서 방송해 줄 수도 있다. 그런 역할이 공영방송의 보편적 서비스의 역할이다. 국가에 기반산업이 필요한 것처럼, 공영방송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고, 또 중요하다.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텔레비전에서 오늘은 과연 어떤 영화를 해줄까?" 기대하면서 채널을 맞추고 싶다. 감칠맛 나는 남녀 성우의 조금은 과장된 목소리 연기에 빠져보고도 싶고, '이런 영화도 있었네!'라면서 몰랐던 영화를 발견하는 기쁨도 느끼고 싶다. 일주일의 피로를 풀어주는 액션 영화도 좋고, 로맨틱 코미디도 좋고, 옛날 영화에서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발견하는 애틋함도 느끼고 싶다.

'주말의 영화를, 살려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