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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성태의 시네마틱 Aug 28. 202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최선을 다하셨어요. 보통의 사람으로서."


사건이 일단락될 줄 알았던 파출소장 윤보민(이정은, 하윤경)이 펜션 사장 전영하(김윤석)에게 위로를 건넨다. 피범벅이 된 셔츠를 입고 망연자실 병원 복도에 걸터앉은 전영하가 힘없이 자책하듯 "오늘 일, 전부 제 탓입니다.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내 아이가 다쳤어요. 내 잘못 때문에"라고 읊조린다. 그런 피해자에게 경찰인 윤보민은 이렇게 위로한다. 여기서 '누가'는 전영하도 알고 있는 과거의 범죄 피해자다.


"개구리... 누가 그랬거든요. 나쁜 일에 휘말렸을 뿐인데 '내가 왜 이 돌에 맞았나' 자책만 하게 된다고. 돌 맞은 개구리처럼, 전영하씨는 피해자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왜 진작 뭔가 하지 못했을까. 최선을 다셨어요, 보통의 사람으로서."


보통사람이란 무엇인가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보통사람이란 무엇인가.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묻는다. 보통사람은 그저 아무 일도 없기를, 오늘의 걱정 따위 내일은 사라지기를 바라며 일상을 영위하는, 내 가족의 안위와 건강이 우선인 범부중생(凡夫衆生)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영하의 입을 빌리자면 보통사람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는 고작 "상상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늘 하던 그대로 했어요"라는 항변밖에 할 게 없다.


전영하는 지극한 타인에게 일상을 파괴당하고 펜션이란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심리적‧물리적 협박 속에서 일생 겪지 못한 고통을 다 강제 체험해야 하는 순간에도 할 게 별로 없다. 법과 수사 기관은 주먹보다, 폭력보다 멀다. 그렇다면, 보통사람의 최선이란 무엇인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영문 모르고 돌에 맞은 개구리들은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영문 제목이 '개구리'(The Frog)인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이 질문을 집요하게, 서사 전반에 걸쳐 묻고 또 묻는다. 집요함이 화근이었을까. 전개가 답답해 '고구마' 서사라는 혹평을 자처하게 된 근원은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의 외피에서만 비롯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애초 서사의 출발부터 존재했다는 이중 플롯이야말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야심 차고 진중하게 깔아놓은 주제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를 독창성으로, 주제의 강화를 위한 어느 정도 비관습적인 서사적 장치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그저 전개를 질질 끊는 불필요하고 불친절한 서사 전체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냐는 개별 시청자들이 선택할 문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드라마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그 주제로 가는 길목에서의 내적 형식이 얼마나 '고구마' 서사를 강화했느냐는 점이다.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


초반을 보자. 전영하의 한적한 펜션에 젊고 어린 모자 손님이 당도한다. 처음엔 몰랐다. 그래서 친절을 베풀었다. 세련된 용모의 유성아(고민시)는 범상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더욱이, 옆 펜션의 에어콘 고장이 빚어진 우연한 숙박이었고, 더더욱 유성아는 암으로 죽은 아내와 얼핏 닮아있기도 했다. 펜션은 대개 완벽한 타인들을 손님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전영하는 이래저래 유성아에게 친절할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전 레이크뷰 모텔 주인인 구상준(윤계상)도 다를 바 없었다. 비가 오던 날 모텔 주변을 차로 서성대던 남자를 부러 바깥으로 나가서는 숙박을 권했다. 손님이 된 남자의 정체를 알 리 없었다. 숙박료까지 깎아주며 제일 좋은 방을 내줬다. IMF를 극복하고자 경매로 나온 모텔을 매입했을 때 상준 부부가 성공의 행복을 꿈꿨던 바로 그 방이었다.


그렇게 전영하도, 구상준도 펜션과 모텔 사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개구리가 되기를 자처했다. 완벽한 타인들은 감춰진 얼굴을 숨겼다. 그리고 개구리들이 일상을 가꿔가는 공간에 침범해 이기적이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랬을 때 그 파장을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또 그 파장은 이 보통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과거의 구상준은 연쇄살인범이 저지른 범죄의 사이드 이펙트(부작용)에 가까웠다. 모텔이 이름과 위치가 언론 보도에 의해 노출되면서 상준 가족의 일상은 지옥도로 변한다. 전영하는 좀 더 직접적이다. 유성아가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범죄 흔적을 스스로 치우고 지워냈다. 의심과 심증뿐이라는 핑계로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불안을 잠재운 채 1년을 흘려보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우리 가족이 뭘 잘못해서"라며 울부짖던 구상준과 달리 전영하는 침묵만 지켜야 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초중반 시간대가 다른 전영하와 구상준을 둘러싼 두 개의 플롯을 진행시킨다. 전영하의 내적 갈등과 유성아와의 심리 게임을 펼쳐내는 사이사이 구상준과 아내 서은경(류현경), 아들 구기호(박찬열, 아역 최정후)의 일상이 얼마나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공을 들여 묘사한다.


이들은 직접적인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모텔 자체가 대중에게 공격당해 유무형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 부수적인 강력범죄 피해자였다. 납득되고 필요하며 인물들이 처한 심정을 공감시키려 정성을 들인 묘사였다. 무엇보다 영어 제목이 가리키는 힌트를 포함해 정리한 드라마의 한 줄 태그나 주제에 딱 들어맞는, 없어서는 안 될 설정이었다. 바로 이런 주제 말이다.


'살인마들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삶을 망쳐버린 개구리, 즉 보통사람들의 연대와 극복에 대하여'.


피해자들의 연대

  

▲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그렇다면 처절하게 망가져 버려 회복 불가인 과거 구상준과는 달리 전영하는 어떻게 연대하고 위기를 극복하는가. 유성아는 보통사람 입장에서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진짜 아들을 죽이긴 했는지, 명품과 호화 승용차는 무슨 돈으로 구매하는지, 진짜 화가가 맞는지, 왜 1년이 지나서 다시 펜션을 찾았는지, 속셈이 무엇이고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그게 더 영하의, 시청자의 불안과 공포를, 궁금증을 배가시킨다.


전작 <부부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모완일 감독은 드라마라는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시청각적 자극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유성아의 행동반경은 전영하의 시점에서 적절하게 유지된다. 날카롭고 극대화된 음악은 지속적으로 전영하(와 시청자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비관습적이거나 전형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 화면과 촬영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그리하여 사건의 연쇄는 구상준 가족의 시간대, 심리적 자극은 전양하의 시간대 쪽에 좀 더 천착하는 식이다. 이러한 분리와 강조는 형식적으로나 주제적으로 대체로 들어맞는다. 과거 시간대의 회상 주체는 아들인 구기호다. 기억에 의존한 사건의 나열이 과거 묘사와 어울린다면 타인이 주도해 나가는 사건으로 인해 돌출되어 휩싸이는 불안과 고통은 현재의 전영하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체험의 서사에 가깝다. 김윤석이 최대한 톤을 다운시킨 채 담담하게 연기한 보통사람 전영하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체험으로서의 서사. 구기호와 직접 만나 과거 구상준 가족이 겪은 진상을 알게 된 후 김윤석이 직접적인 액션을 취하는 전개의 변곡점도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는 전영하가 그마저도 불안을 이겨낼 방법인 직접적인 행동과 대응밖에 없음을 깨닫는 데까지 걸리는 서사적인 시간과 구기호가 20년 가까이 기다린 복수의 완성까지를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구태여 연대라는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보통 사람이자 연쇄살인범들에게 피해를 당한 구기호와 전영하가 맞잡은 손이야말로 장르의 외피를 뚫고 나온 주제인 셈이니까.


단순하고 형식적인 불친절일 수 없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구조는 서스펜스 범죄 장르 법칙에 충실할수록, 친절한 서사일수록 주제적 야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무심코 던진 돌을 피할 수 있다면, 유성아라는 '미친 여자'의 행동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다면, 개구리나 보통사람일 수 없다. 구조 자체가 그 절절함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인 셈이다.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도 마찬가지고.


예측 불허의 범죄자의 극악무도함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보통사람의 체험에 걸맞은 비관습적인 서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형식적이고 미학적인 강세야말로 장르 외피보다 인물들의 서사에 충실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후반부에야 비로소 구기호는 왜 자기 파괴적인 복수에 나섰는지, 전영하는 왜 총을 직접 들 수밖에 없었는지 납득된다. 켜켜이 쌓아 온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인물의 배경이 행동으로 폭발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올해의 여우주연상 후보 고민시

  

▲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관련 이미지. ⓒ 넷플릭스


그 대척점에 고민시 배우가 올해의 여우주연상 감 연기를 펼친 '미친여자' 유성아가 자리한다. 이조차 정확히 대구를 이룬다. 과거 구상준 가족을 지옥에 빠뜨린 타인이자 손님은 전형적인, 현재에 존재하는 연쇄살인범이었다. 아마도 사이코패스였을 터다.


유성아는 여기서 훨씬 더 현대적으로 진화(?)한 범죄자 캐릭터다. 한국영화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성 사이코패스 범죄자 역할을 보기 좋게 현현해 낸 고민시가 숨과 온기를 불어넣은 유성아는 종잡을 수 없어서 매력적이고 공포스러운 여성이다. 모성애따위 개나 줘버리라는 듯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아이를, 사람을 해한다.


유성아에게 살인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행동에 걸리적거리는 상대를 제거하는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다. 전형적인 연쇄살인마나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더 무섭다. 유성아는 1년 전 자신의 행동으로 아버지의 부와 권력에서 배제될 것을 감지하고 폭주한다. 그 폭주의 근본적인 배경이 재력이라는 점이야말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숨긴 뇌관이다.


더 이상 유영철류의, 20~30년 전 연쇄살인범들이 탄생하지 않는 게 그저 만연한 CCTV들과 과학수사 기법의 발전 때문일까. 아동 살해나 토막 살인마저 개의치 않는 물신의 노예이자 한국이란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유성아인 것처럼 보인다. 유성아라는 캐릭터 전반이 줬던 위화감이나 부유감이 어디서 연원하는지 후반부에야 명확해지는 것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유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드라마 전편을 지배하는 질문이자 인물들이 직접 발화까지 하는 이 명제의 행동 주체는 과거와 현재 사건 모두를 목격한 경찰 윤보민이다. 여기서 '커다란'(큰)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타인에 의해 우연히 겪게 되는 범죄를, '아무도 없는 숲속'은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쿵' 소리가 들렸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당신의 숲속은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 서사 전체를 통해 묻는다. 그러고는 시청자들에게 술래가 되어 달라고, 보민의 위치에 가 달라고, 범인을 잡지는 못하더라도 범죄 피해를 줄이고 피해자들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는 방향으로서의 술래 자리를 요청한다.


<부부의 세계> 방영 이후 4년, 모완일 감독이 내놓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JTBC 신인 극본 공모작을 가지고 아무래도 절치부심한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수작이다. 특히나 빠른 전개, 사이다 결말, 자극적인 소재들이 넘쳐나는 OTT와 K-드라마 시대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과 이를 뒷받침하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보통사람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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