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년필은 초보자를 위한 만년필로 가장 많이 추천하는 ‘라미 사파리’다. 내가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은 상담내용을 항상 만년필로 적으셨는데, 내가 만년필에 관심을 보이자 (내가 먼저 달라고 했던가?) 펜꽂이에 있던 파란색 라미 사파리에 몽블랑 잉크를 채워서 주셨다. 부적처럼 힘을 얻으려고 출근하는 가방에 꼭 챙겨 다니곤 했다.
두 번째 만년필이 될 뻔한 제품은 라미 2000 마크론롤이다. 유튜버 이연님의 만년필 추천영상을 보았는데(팬이라서 그런지 이연님이 소개하는 제품은 다 좋아 보인다) 1960년대 처음 나온 제품인데도 디자인이 모던하고 가격도 20만 원대라서 이 제품을 구입하려다가 ‘20만 원이면 큰돈인데 신중하게 사야지’라고 만년필 브랜드 검색을 시작했고, 그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
만년필 브랜드 중에 가장 유명한 브랜드는 몽블랑으로 가격이 무려 100만 원 정도였다. 만년필에 100만 원이나 쓸 생각은 없고, 다른 만년필 브랜드도 검색해 보았다. 펠리칸, 카웨코, 워터맨, 오로라/파커/파이롯트, 세일러, 트위스비, 홍디안 등 생각보다 나라별로 브랜드가 다양했다. 정치가와 사업가는 몽블랑, 문필가와 문학가는 펠리칸이라는 글을 보고, ‘나도 마음은 작가다’(브런치 글은 노트북으로 쓰고, 일기만 손글씨로 쓰는 건 안비밀), 조류독감(펠리칸 만년필에 빠지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펠리칸 소버린의 경우 제품 숫자가 커질수록 만년필 크기도 커지고 가격도 더 비싸다. M200(스틸닙)/M400(금닙)-M600-M800-M1000으로 크게 5가지 종류이다. 1000은 일상적으로 쓰기에는 너무 클 것 같고 성능면에서는 800을 추천하는 글이 많았지만 나는 뚜껑을 꽂고 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손 크기까지 고려하면 600이 제일 적당할 것 같았다. 가격은 42만 원, 잃어버리지 말고 평생 쓰자고 결심하고 구입했다.
그 외에 사용해 본 만년필은 홍디안 만년필(기대보다 꽤 부드럽게 잘 써졌다), 미도리 팝업에서 시필했던 제품명은 기억 못 하는 파이롯트 만년필, 미도리 만년필(둘 다 쏘쏘였다) 정도지만 만년필을 고르는데 도움이 될 만한 기준을 공유하고 싶다.
만년필을 고르는 기준
1. 사이즈
손크기, 뚜껑을 꽂고 쓰는 스타일인지 아닌지
2. 무게
묵직한 쪽이 들었을 때 더 고급스럽긴 하지만 만년필로 글씨를 많이 쓰는 경우에는 무게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M600은 꽤 가벼운 편이다.
3. 싫증 나지 않는 디자인(특히 개취영역)
처음에는 펠리칸 소버린 스트라이프 제품이 예뻐 보였지만, 평생 쓸 거라고 생각하니 블랙이 싫증나지 않을 것 같았다
4. 필감
사각사각파/ 버터필감파
라미 사파리는 사각사각하고 펠리칸 M600은 굉장히 부드럽다.
5. 펜촉 굵기
ef-f-m-b순으로 굵어진다.
같은 촉이어도 보통 아시아 브랜드 만년필이 유럽 만년필보다 가늘다고 한다.
필기용으로는 보통 ef, f를 사용하고 캘리그래피나 드로잉용은 굵은 촉을 사용한다.
라미 사파리, 펠리칸 M600 둘 다 EF촉인데 M600이 사파리보다 더 굵게 나온다. M600의 경우 F촉을 구입했으면 한글 쓰기에는 많이 두꺼웠을 것 같다.
6. AS
신한커머스에서 정식 수입한 펠리칸 제품을 구입했는데 닙 교정의 경우 평생 무료이고 보증기간 내(3년) 1회 무료, 보증기간 초과 시 부품비용 50% 부담이라고 한다.
몽블랑의 경우는 AS비용이 10만 원이나 한다고 한다.
더하기
만년필 구입 후에는 잉크의 세계가 펼쳐진다. 펠리칸 4001 잉크는 62.5ml에 7천 원 정도이고, 에델슈타인 잉크는 50ml에 2만 1천으로 가격이 세 배 이상이다. 에델슈타인 오닉스 잉크만 샀는데 사파이어 색과 토파즈-바이올렛 색도 예뻐 보인다. 만년필 애호가들이 추천을 많이 하는 파이롯트 이로시주쿠는 색이 무려 24가지나 된다.
다음 단계는 만년필 잉크는 받쳐줄 수 있는 종이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종이가 받쳐주지 못하면 흡수가 되지 않아 번지기도 하고, 종이 한 면을 쓴 후 넘겼을 때 앞면에 쓴 글씨가 비쳐서 글씨를 쓰기가 어렵다. 로디아 다이어리(90g), 미도리 노트, 몰스킨 클래식 하드커버노트의 경우 비침이 양호한 편이고 같은 몰스킨이어도 스타벅스 프리퀀시로 받은 다이어리는 비침이 심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