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시작하며
현대 미술
하얀 전시장에 걸린 정체모를 작품들, 무언가를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 왠지 어렵고 아리송한 느낌.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서 대략 이런 반응들이 돌아오곤 합니다. 저 역시 매우 공감합니다. 현대 미술은 '설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까다로운 문화 생활인 것은 맞는 말이니까요.
저는 그 현대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정말 학과명이 '현대미술학과'였거든요. 영문과를 전공해서 모두 영어 박사가 아니듯 저도 현대 미술 앞에 서면 쪼그라들곤 합니다. 오히려 전시장이라도 갈라치면 "이 작품 설명해봐라"는 요구에 시달려야 했죠. 학교에서는 그러려니 했던 어려운 이론 공부들은 정신 차리고 보니,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참 많았습니다. 왠지 모든 비평은 '기승전-발터 벤야민'으로 흐르는 것 같고, 오브제가 어떻고 맥락이 어떻고 하지만 결국 결론은 '관람객이 보는 대로 해석하시라'라고 끝내는.. 왠지 (무책임한듯한?) 전시 설명의 결말.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지만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결국 현대 미술을 어려운 존재로 만들었겠지요. 개념미술, 추상미술이 활개를 치던 1900년대 중반, 서구 미술계에서도 '요즘 미술 너무 어려움' '대중이 따라가질 못하겠음' 이런 쓴소리를 하는 비평가들이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미술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예술의 전당에서 볼 수 있는 명화들이 가득한 미술관을 생각하면 쉬운데, 미술은 그런 명화를 감상하는 아름다운 행위 그 자체였던 거죠.
Interior of the Monastery of Altacomba Giovanni Migliara1833/1833 (c) Fondazione Cariplo
영화도 없던 시절, 유명한 신화를 모티프 한 이런 명화들이 주는 시각적인 쾌감과 경이로움은 분명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것이었을 겁니다. 미술이 주는 그런 경이로운 기분은 '미술 = 예술'이라는 상관관계를 더욱 돈독히 결박시켜주게 되었을 거고요. 저는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쫒는 에너지가 지금의 현대 미술까지 오게 한 원동력이라고 믿습니다. 10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사조와 실험들이 생겨나고 지면서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겠지요.
Yellow White, Ellsworth Kelly, 1961
명화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운 느낌을 엘스워스 켈리의 이런 조각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요. 켈리의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분명 명화 속 화가의 기량과 화려한 붓터치와는 다른 기준의 아름다움이 아닐까요. 어느 날 몸과 마음이 지쳐 녹초처럼 축 처진 저에게, 명료하고 고요한 울림이 주는 그 위안과 부드러운 다독임은 분명 명화의 감동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매번 기획안을 들이밀 때마다 예전 저희 편집장님은 이렇게 운을 뗐습니다. "좋긴 한데, 미술사조 얘기하고 어려운 비평 같은 글을 실을 거면 미술 전문지 보지 뭐하러 우리 책을 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도 뭘 시작할 때 이 말을 되새깁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편집장님은 이래저래 기획이나 취재 대상에 엄청난 자유권을 주셨지만 핵심은 참 잘 짚어주셨던 분이시죠. 시간이 지나 그 미술 전문지에서 일하고 있는 건 아이러니지만요.(웃음)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메일을 받고 나서 약 2주 동안이나 첫 글을 뭘 쓸지 고민했습니다. '현대 미술은 이러이러한 건데요, 참 쉽죠?' 혹은 '이 작가의 의도는 이러이러한 거랍니다' 같은 글이 아닌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밥벌이로 글을 쓰지 않는 유일한 저만의 공간이 다른 여러분께도 부디 좋은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