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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sso Jun 21. 2016

늙음에 대한 오만

  나중에 아들과 저렇게 지내고 싶었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반가이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총총 헤어지는 관계. 내가 좋아하지 않는 극강의 차림새(올백 머리에, 쫄바지에, 터프가이 나시, 거기다 문신까지)를 한 아들을 만나도 쿨하게 인사하고 헤어지는 장면을 생각해보곤 했다. 성인이 된 자녀(특히 결혼한 자녀)의 인생에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많은 우리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외할머니는 올해 88세로 해가 갈수록 깜박깜박하시는데, 하셨던 말씀을 또 하고 또 하고 하시더니 지난 추석 때 뵀을 때는 용돈을 주시고도 용돈 줬는지를 끊임없이 다시 물어보셨다. 장녀인 우리 시어머니만 보면 당신 통장에서 돈을 찾아 달라고 하여 계속해서 가족들에게 용돈을 주신다고 한다. 키가 자그마하고 하얗게 고운 할머니가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자식들 이름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부르는 모습을 보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를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은 늙음에는 돌봄과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쿨한 늙은 엄마. 사고의 자유도가 높다고 해서 거저 될 리 없다. 우선 나이가 들어서도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안정이 필요하며, 같이 놀 착한 남편이 오래 살아야 하고(착한에 방점을), 내 생활을 결정할 판단력도 잃지 않아야 하고,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으면 금상첨화겠고, 무엇보다 치매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늙음의 외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함까지 필요하다. 진짜 늙어보지 않고는 결코 쉽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들만 둘 가진 시어머니가 언젠가부터 남편보다 나와 통화를 오래 하시게 된 것은 나와 소통할 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었던 거다. 어머니는 김장 김치가 아직도 맛이 있는지, 양념이 떨어진 것은 없는지, 유난히 독했던 올해 감기의 후유증이라든지, 할머니를 돌보는 비법(소소한 일거리를 드리는 게 비법이라고 하심)이라든지를 아들이 아닌 나에게 얘기하신다. 이렇게 얘기하시는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일로 그 전에는 자식들한테도 나한테도 말씀이 많이 없는 분이셨다. 딸부자인 우리 엄마는 원래부터도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말하고 표현도 직설적이시라 연세가 드셔도 그다지 변함이 없으신데 비해 우리 시어머니의 변화는 드라마틱하다고나 할까. 전화로 보고 싶다 말씀도 하시고 필요하신 게 없냐고 여쭤보면 이전에는 일절 거절하시던 것이 이제는 조심스레 이런저런 물건에 대해서도 의논하시니 말이다. 돈 문제라기보다 필요한 물건을 고르고 사는 것이 힘겨울 나이가 된 것이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사회적으로 만나는 인간관계가 줄어들고 일상을 나눌 사람이 점차 없어진다. 나눌 사람이 없어질수록 외로움이 같이 오고 오랜 세월 몸과 마음으로 키운 자식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우리 시어머니처럼 활동적이고 인간성 좋은 분도 해가 갈수록 밖에서 지인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이니 남편과 나 같은 사람은 어떨지 뻔하다.


  늙어보지도 않고 쿨한 늙은 엄마를 쉽게 생각한 나의 오만함을 반성하며, 지금은 우리 엄마와 시어머니 같은 부모만 되어도 성공이다 싶다. 두 분은 너그러운 편이고 잔소리도 거의 없으시고 우리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인생에 일절 간섭하지 않으신다. 나의 성향이나 가치관과 맞지 않는 부분도 많지만 간섭과 강요가 없으니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두 분처럼 헌신적인 스타일의 엄마가 되기는 이미 틀려먹었고(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아침에도 당당하게 찬 밥을 준다) 일단 잔소리 없고 간섭이 없는 에 포커스를 맞춰볼까나.


  그래, 쿨한 늙은 엄마 따위. 나이 들면 아들이 보고 싶어 지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래도 너무 보고 싶어 지지는 않게 남편하고 살 궁리를 많이 해 놓아야겠다.






** 이런 변화 때문인지 요즘 노희경 작가의 <디어마이프렌즈>를 폭풍 공감하며 보고 있다. 십년 전이었더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약간의 아저씨 혐오증이 있었던 내가 신구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보고 있으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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