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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un 01. 2023

불안장애 환자에겐 아플 자유가 없다

   자전거를 선물 받은 지 이틀 만에 코너를 낀 내리막길에서 마주 오는 자전거를 피하려다 턱에 부딪혀 대차게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 눈썹 부위쪽을 1.5cm 정도 꿰맸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경험도, 그렇게 진한 피비린내 냄새를 맡는 것도 처음이었다. 피가 계속 흘러서 쓰고 있던 마스크로 지혈해야 했다. 설상가상 안경도 박살났다. 다행히 늦은 시간까지 하는 병원이 있어서 늦지 않게 상처를 꿰맬 수 있었다. 6개월 동안은 흉터 연고를 꾸준히 발라줘야 흉 없이 아물 수 있다고 한다. 꿰맨 곳에 눈썹이 날아갔고, 앞으로 자라지 않을 것 같다. 강제 제모, yeah!




  "두통은 없어요? 나중에라도 두통이 있으면 응급실 가서 검사 꼭 받으셔야 돼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혼란스럽다. 뇌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두통은 엄밀히 말해 두피통과 목근육 긴장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이다. 긴장성 두통을 달고 사는 불안장애 환자에게 두통은 증상을 예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혹시나 해서 정신과 의사에게 원인에 따라 두통을 구분할 수 있는지 물어봤더니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뇌진탕이 있을 정도의 충격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지만, 사고로 인해 긴장도가 높아져 한동안 두통의 빈도가 높아지긴 했다. 불안장애 환자는 물리적인 충격으로 두통이 발생할 만한 사건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라고 나도 생각하지만. 누가 알았겠나. 마흔 넘어서 자전거 타다 사고가 날 거란 걸. 재수 없으면 그냥 뒈져야지.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있기에 두통이 있는 게 아닐까. 생에 대한 끈을 온전히 접은 건 아닐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그래도 만에 하나 내가 잘못된다면, 가족들이 나를 빨리 포기해줬으면 좋겠다. 가족들이 가망도 없는 나의 생존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시간을 헛되게 보내는 건 싫다. 하지만 자전거 사고 후 무덤덤한 나와 달리 늦은 시간에 봉합 가능한 병원을 찾으며 안절부절하는 부모님을 보니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목욕탕에서 비누를 밟고 미끄러지면서 부딪히는 바람에 목에 상처가 나 꿰맨 적이 있었다. 퇴근 후 뒤늦게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엄마에게 분노의 슬리퍼 던지기를 시전했다. 아버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병원 가는 차 안에서도 아버지는 누구보다 불안해 보여서 엄마와 나는 "침착해! 침착해!"를 외쳤다. 퇴사 후 본가에 내려와 긍정적인 면이라면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서울에서 혼자 살 때보다 살아야 할 이유를 훨씬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 약을 꾸준히 복용하고 보조제인 불안장애 관련 약과 기분조절 약을 줄이는 연습을 꾸준히 하고 있다. 복용일지를 가져가면 많이 줄었다는 칭찬을 받지만, 돌이켜 보면 아파도 약을 먹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기 때문에 복용량이 줄어든 것뿐이다. 약을 먹지 않고 아파서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이 약을 먹고 쾌적한 생활을 누리는 것보다 결코 나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안마, 마사지, 스트레칭 등을 하며 발버둥을 친다.


  오늘도 이런 저런 차선책을 시도하다가 머리를 박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장애 관련 약을 하나둘 먹다보니 결국 일일 최대복용양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퇴사 전 메모를 보면 '머리통을 뜯고 싶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마치 그때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약을 안 먹는 것보다 중요한 건 하루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과정을 벌써 몇 번째 반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다시 요가나 스트레칭, 명상을 시작해야 될 때가 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몸이 전체적으로 많이 굳어 있고, 부족한 체력도 키워야 한다.




  아픈 게 디폴트로 깔려 있기 때문에 불안장애 환자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게 생활해야 한다. 스피드광이지만 열악한 도로환경에 맞춰 자전거를 느리게 타기 시작했고, 사고 현장을 지날 때는 트라우마 때문에 걸어서 이동한다.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7월부터 공시생이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는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바로 공부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고, 미뤄뒀던 여행을 조금 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러 서울에도 방문할 계획이고, 건강을 위해 걷기 운동도 자전거 타기도 본격적으로 시작할 계획이다.


  마흔이 되면 살기 위해 운동을 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동네 달리기나 걷기라도 꾸준히 해보려고 한다. 계약직 사서는 6월 한 달이면 이제 계약이 끝난다. 남은 한달 동안 앞으로 공무원 시험을 어떻게 준비할지 등 자료조사도 하고, 휴일에 도서관도 다니면서 공부하는 연습도 슬슬 해보려고 한다.


  "제가 공부하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의사선생님에게 물었더니 지금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문제에만 집중하라고 하셨다. 공부를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때 가서 직접 해봐야 알 수 있는 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고 이후 자전거를 타면 좋은 점은 안전을 위해 바로 코앞에 있는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거다. 바로 앞에 물웅덩이가 있지는 않을까, 위험한 턱이 있지는 않을까, 갑자기 보행자가 뛰어들어오지는 않을까. 이런 것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다. 멀리 바라보다보면 바로 앞의 일을 놓치게 되고 곧바로 사고로 이어진다. 생각이 많은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자전거를 타는 게 좋다. 뭔가 부족한 내 정신을 수양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6월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약을 줄이는 것보다 지금 쾌적하게 사는, 지금에 충실한 삶으로 다시 되돌아가려 한다. 불안장애 환자는 두통을 참지 않긔. 약따위 과감하게 먹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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