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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an 07. 2023

사서로 전직하다

  도서관에서 일하고 싶어서, 퇴근 후 학점은행제를 들으며 사서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자격증이 있다고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서 자격증을 취득한 이후로도 나는 몇 년 동안 교직원이라는 기존 커리어를 유지했다. 우울증으로 퇴사 후 낙향해 다시 재시도했지만, 내게는 사소한 자리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존 커리어를 살려 지역 대학에 입사했다.


  국고 사업단이라 조금은 편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일하기 싫어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환경에서 국고 사업단은 하지 않아도 될 기획을 해야 하고, 심지어 수행도 도맡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튀어버리는 바람에 나의 업무환경은 나빠졌다. 단순히 업무량의 문제가 아니라 지근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상사와 동료가 문제였다. 어려움에 대해 몇 차례 면담을 했지만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상황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끝났다. 리프레시하려고 지원했던 도서관에 덜컥 합격했다. 이틀짜리 일도 못 얻었던 생초짜 주제에 풀타임 잡을 얻었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중간관리자의 불만을 어깨에 얹고 사서로 전직했다.




  "퇴직금 안 주려고 6개월 근무한 사서는 안 뽑아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 상황이 수년간 반복된 상황인 줄 알았다. 알고보니 올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년에도 최대 근무기간이 1년이었고, 기존 근무자에게 특이사항이 없었음에도(아마도?) 두 명 모두 재계약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현장에서는 당연히 경력직, 기존근무자가 꾸준히 일하는 게 편하다. 이건 정부에서 예산축소를 위한 지침 아닌 지침이 있었기 때문일 거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퇴직금 아끼려다 실업급여가 더 많이 나가겠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일 뿐. 통계적으로는 이게 유리하기 때문에 선택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노동부 직원의 처우가 가장 열악하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은 적이 있는데,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할 정부가 나서서 더욱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올해 내 일정의 큰 줄기는 정해졌다. 6개월 사서, 6개월 실업급여자.




  "사서 공무원에 도전해봐."


  부모님은 내가 도서관에 취업하자마자 그런 말을 했다. 공부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서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특히 취업과 관련한 공부는.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지금의 나는 단순업무밖에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주 조금이라도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최근 약을 미복용하는 날이 조금씩 늘고 있다. 남들에게는 '겨우'겠지만, 나에게는 매우 유의미한 통계다. 어쩌면 사서로 일하는 동안에 약을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상태가 나빠지며 가느다란 희망의 가지를 톡 꺾어준다. 이제 이런 루틴도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상태가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차츰 좋아지다 보면 예전처럼 머리를 굴려도 괜찮은 상태가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조금은 기대를 품어도 괜찮을 거 같다. 잘 모르긴 하지만 사서 공무원까지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직종이 안 맞는다는 걸 깨닫고 원래 커리어로 돌아가는 것, 더 멀리는 다시 서울에 돌아가는 것까지. 나는 모든 것을 선택지에 넣어뒀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마흔한 살, 교직원에서 사서로 전직했다. 앞으로의 6개월은 내게 매우 의미있고 소중한 시간이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정할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기간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내내 방황하고 고민해 왔다. 이 질문에 대한 답에 이제는 종지부를 찍고 싶다.


  2023년, 올해를 나는 '종지부의 해'로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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