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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LL Jan 27. 2023

좋은 말로는 끝나지 않는다

  "○○님은 너무 벽을 쌓는 면이 있어요. 그렇게 갇혀 사는 건 좋지 않아요."


  세 달 동안 세 번 본 사람에게 성격진단을 받았다. 글쓰기 모임에 오라는 제안을 받았고, 나름 신중하게 검토한 후 거절했다. 제안 받은 글쓰기 모임은 체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고, 전문적인 글쓰기 훈련을 바라는 나의 니즈와 달리 가벼운 수준의 에세이 모임이었다.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그는 집 앞까지 따라와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라고 집요하게 강권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의 얼굴에 나를 자신의 편리에 따라 이용하려던 누군가의 모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자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나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내 눈은 겨울 바닷바람에 얼어터진 동태눈깔이 됐고, 내 성격을 두고 가스라이팅할 때는 눈으로 썩소를 날렸다. 내가 모임의 틀을 만들어줬으면 한다는 말을 할 때는 어이가 뇌 밖으로 탈출하는 바람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무슨 다단계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네요. 너무 부담 갖지 마요."


  갈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부담감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상대방에게 죄책감을 심음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한 인간의 몸부림을 덤덤하게 지켜봤다.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다단계'와 '부담'이라는 말을 몇 번 더 반복한 후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같은 방향이라며 집 앞까지 따라온 그는 그새 자기가 한 말을 잊은 건지 걸어온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섬찟함을 느꼈다.




  '트로피'


  그와의 대화 중 불쑥 이 단어가 떠올랐다. 그는 타지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과 집도 가까운 내가 이곳에 자리 잡기 위해 또래들이 모인 글쓰기 모임에 가입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친목을 위해 필요치도 않은 모임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 모임은 그저 "타지역에서 온 동네친구"라는 트로피를 얻기 위한 구실이 아니었을까.


  "착하게 말하니까 안 갖다주죠."


  배달 누락된 신문이 퇴근할 때까지 오지 않자 이전부터 근무했던 직원이 한마디 툭 던지며 신문사에 다시 전화했다. "예쁘게 말해요!"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착하게 말했더니 신문사는 무책임하고 신뢰 없는 거래처가 돼버렸고, 정중한 거절은 상대방을 다단계 영업사원으로 만들었다.




  모임의 성격이 나의 니즈에 부합하지 않아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합리적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대화를 연장시킬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내 의사가 아니라 자신의 필요다. 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 와야 한다는 그의 말에는 내 시간에 대한 나의 선택권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를 단념시킨 건 친절한 말이 아닌 싸늘한 눈빛이었다. 대화 말미쯤 나의 말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눈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눈은 갈길을 잃고 흔들렸고, 눈에 띄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얕은 관계의 사람들에게서 자주 보는 반응이다.


  "○○님은 너무 벽을 쌓는 면이 있어요."


  그가 옳았다. 그의 카테고리가 무관심에서 기피대상으로 바뀐 후, 나는 그와의 사이에 벽을 쌓았다. 벽은 아주 두껍고 견고해서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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