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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중한 필름카메라

by 정인기

저는 아버지께서 남기신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종종 거리에 나가 사진을 찍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 살지만 대부분의 회사생활을 수원에서 했기에 주요 생활권이었던 수원을 벗어나 서울 시내 거리로 출사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설이나 추석 명절과 같이 연휴가 길 때 가끔 서울은 전쟁 전 모두가 빠져나간 것같이 사람이 없어 조용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골목길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남기기에 여유롭습니다. 특히, 을지로 뒷골목은 서울의 옛 모습이 남아있어서 필름카메라로 남기기에 좋습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화문이나 청계천 행사에 참여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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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사용하는 필름은 유통기한이 2006년도까지인 필름입니다. 장롱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는데, 현재의 서울 거리를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전의 과거로 돌려놓기에 충분한 사진들을 만들어줍니다. 어떤 곳은 옛 건물들이 남아있고 아직 개발되지 않아 필름 사진이 본연의 모습을 더 잘 나타내줍니다.


궁궐 주변이나 한옥마을 주변에는 알록달록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다니는 관광객들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선비와 왕후 여럿을 하루에도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이들의 빛바랜 사진을 남기면 어렴풋이 서울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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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수도이며 첨단 기술이 집약된 서울이지만 반대로 서울 시내만큼 이 올드한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기에 좋은 곳도 없는 것 같습니다. 6, 70년대 건물들과 다양한 문화재들도 한몫하네요.

필름의 유통기한이 지나도 상관없습니다. 빛바랜 사진은 시대의 더 큰 왜곡을 선사해 줍니다. 가끔 필름을 다 사용하지 않았는데 필름 덮개를 열어서 빛이 스며든 사진들도 나오는데...


이 또한 상관없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저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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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동 필름카메라의 경우 무엇보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매번 진행하는 필름 장전이, 수동으로 초점을 맞추는 과정이 재밌습니다. 과정이 오래 걸리면 오래 걸릴수록, 빛바랜 사진이 나올수록, 빛이 스며들수록 이 사진들은 더더욱 소중하고 기억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순간 그 실수만이 그 작품을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요.


칼같이 선명한 사진들은 이제 AI가 우리 인간보다 더 잘 찍고 보정하고 창조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매일 촬영한 수천, 수백 장의 사진 중 가장 좋은 사진을 선별하는 것이 사진작가들에게는 번거로운 일이기도 한데, 요즈음에는 베스트 사진을 AI가 대신 골라주기도 한다죠? 모든 것이 선명하고 자동화된 세상에서 필름카메라로 조금은 흐릿한 세상을 담아내는 것도 그리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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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남기신 필름카메라로 서울 시내 뒷골목의 사진을 찍으며 어릴 적 아버지와 시내를 걸었던 추억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부 기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이 카메라로 사명감을 가지고 특종을 남기시기도 하셨을 텐데...


그렇게 아버지는 저에게 소중한 선물과 기억을 남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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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다시 카메라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날로그의 경험 없이 디지털 기기를 바로 접한 젊은 세대들에게 필름의 빛과 색감을 경험시켜 주는 카메라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편의점이나 문구점에서도 일회용 필름카메라나 일회용 흑백 필름카메라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는데,


불확실성이 매력인 일회용 필름카메라 하나를 구매하여 주말에 가족, 친구들과 추억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24장, 36장이라는 필름 한 롤의 한정된 개수에 담아낸 자신만의 작품. 다 찍은 필름 사진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가 수십 년 후 다시 꺼내 본다면 빛바랜 사진이지만 때로는 추억이 담긴 보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네요.


* 본 글에 사용된 카메라 : 아사히 펜탁스 ME, 삼성 S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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