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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cialA Dec 30. 2023

15  다음 Step을 위한 Exit

초창기에 회사에 이런저런 세팅을 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당시, 상무님께 스타트업에서 내 역할이 뭔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스럽다고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상무님은 나에게 드라마 스타트업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네가 수지라고 생각하면 돼.'


'수지라기엔 일단 외모부터 너무 다른데요'

'아니 수지가 네가 맡은 포지션이랑 비슷하다 생각하면 돼.


그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드라마 스타트업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에서의 수지는 사실 회사에서 나보다 더 중요하고 큰 포지션이었다. (그리고 예뻤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상무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신 건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실무자'로서 최전선에 있는 것이었기에 수지와는 조금 달랐지만, 그 역할과 마음가짐은 딱 그와 같았다.




처음 퇴사를 마음먹은 건, 내가 모시던 상무님이 회사를 떠나실 것을 알게 됐을 때였다. 초창기부터 함께 하던 팀이기도 하고, 내가 많이 의지했던 분이기도 했기 때문에 상무님이 떠나셨을  꽤나 많이 흔들렸다. 이후 상무님이 떠나신 자리에 새 상사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조직이 개편되어 다른 상무님을 직속으로 모시게 되었을 때도 흔들렸지만 버텼다.


두 번째 모시게 된 상무님을 첫 상무님보다 더 오래,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하며 손발을 꽤나 맞추었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회사에 새로운 사람들도 들어오고 조직에 생기가 불어넣어졌지만, 그 생기는 점차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생각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는 회사 덕분에 내 커리어가 불투명해지는 게 느껴진 순간,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모시던 상무님께 말씀드렸다. 놀랍게도 상무님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다. 나중에 말씀해 주셨지만 상무님이 퇴사를 결심한 순간은 내가 그 고민을 상담하던 때였다고 한다. 1호 직원인 내가 회사를 떠나면 더 이상 회사가 우리가 기획했던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명확했다며 그날 퇴사를 결심하셨다고 다.

   

일개 직원으로서 경영방침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왜 기획을 아무리 꼼꼼히 해가도 보지 않았는지, 한 시간 두 시간을 브리핑했지만 며칠 뒤에 그런 말 들은 적 없다는. 지금까지의 회사생활을 통해 겪어보지 못한 반응을 겪으면서, 그간 스타트업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열정을 바쳤던 내 시간이 아까웠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 퇴사를 결심했다.



회사생활 다 그렇지



모두가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만,


회사의 비전이 불투명하고, 임원진이 다른 속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회사에서 약속했던 것을 너무도 무례하게 지키지 않는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커리어가 흙탕물이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걸 참고 회사를 몇 년을 더 다닌 들 시간만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반문을 해보고 싶다.




그래도 얻을 건 다 얻었다



내가 퇴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주변에 조심스레 알렸다. 가족들은 그간 내가 고생해 온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래 네가 결정했으면 됐어.라고 지지해 줬다.

회사에서는 같은 팀에 있던 부하직원 둘이 안 그래도 자기들도 고민했다며 그들도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상무님도 나도 손발이 잘 맞았던 우리 팀이 모두 와해되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서로가 서로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느꼈다.


다만, 우리 팀의 와해가 회사를 배신하는 단체행동으로 비치는 게 싫어 각자 원하는 퇴사시기와 지금 처리 중인 업무를 정리해서 회사에는 최대한 후임자를 구할 시간을 넉넉히 주고 업무에는 지장이 없도록 인수인계를 확실히 해주는 것으로 모두 약속했다. 들어온 지 3개월밖에 안된 막내 친구는 수습을 겨우 떼고 퇴사를 하게 되어서 좀 미안하기도 했다. 더 다녀보는 것도 선택이기에 존중한다고 했지만 우리가 모두 없는 곳에서 자기 혼자 남아 적응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친구도 그간 너무 지쳤다며 다른 꿈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도 내 커리어를 위해 여기까지가 최선인 것 같았다. 아직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그간 방패가 돼주셨던 상무님이 떠나시고 나면 더 이상 나를 지켜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은 퇴사뿐이었다.





인수인계서는 거의 한 달이 걸려서 완성했다. 매일 조금씩 써 내려갔고 인수인계를 마치는 그 순간에도 계속 생각나는 것들이 많았지만 최대한 적어냈다. 20페이지가 넘는 인수인계서가 완성이 됐고 2TB의 외장하드와 함께 후임자에게 넘겨줬다.


인수인계서를 쓰면서 보니 그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난 많은 것에 도전했고 해냈다. 사무실  칸 없을 때부터 지금의 사무실 곳곳에서부터 시작해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제법 직원이 여럿 다닐 있을 만한 기초를 가진 회사로 만들어냈고 인사총무, 재무회계, 전략기획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일을 바닥부터 시작해서 해냈다.


정말 1도 몰랐던 일도 있었지만 맨땅에 헤딩해서 해낸 뿌듯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열정을 다하며 보낸 시간들도 있었기에 헛되게 허비한 것은 아니었다. 이 회사에서 얻고 싶었던 것 중 70% 정도는 얻고 간다고 느꼈다. 어찌 됐던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떠나는 날 인사를 하는데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무뎠다. 정신없이 짐을 챙겨 나오기 바빴기에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회사 건물 관리인 노부부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고 거기서 폭풍오열을 했다. 이 회사에 온 첫 순간부터 마지막순간까지 모두 봐주셨던 분들이었다. 내가 작은 부분 하나하나 신경 쓴 것을 회사사람들은 하나 알지 못할 때 그분들은 다 알고 계셨다. 고생했다며 토닥여주시는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나는 또다시 exit을 하게 됐다.

새 출발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진 않는다.

당분간은 쉬면서 깊은 사유가 필요할 것 같다.


나의 치열했던 바이오스타트업 경영기획 생존기는 막을 내린다.

비록 끝까지 생존은 못했지만 살고자 숨 쉬던 그 치열했던 한때는 내 직장생활의 어딘가 한 페이지에 남아있을 것이다.



잘해왔어. 그리고 고생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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