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쓰는 글 1
- 출발: 우리 집
- 도착: 신촌 니즈 버거
- 출발할 때 들은 노래: California Dreamin’ _The mamas & The papas
어젯밤에는 글을 쓰고 싶었다. 잠에 들면서 내일은 꼭 뭐라도 써야지 다짐했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길고도 완결된 하나의 글을 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책상에 고이 앉아서 노트북으로 쓰는 글에서 느껴지는 밀도감이랄까. 그런 걸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지키다가는 한 줄도 못 쓸 것 같아서 마음을 좀 바꿨다.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 안, 도로 위에서 글을 쓰자. 타면서 시작하고 내리면서 끝내자. 제한시간은 00분. 자 이제부터 빨간색 보도블록만 밟는 거야- 어릴 적 길을 걸으며 자주 했던 나와의 게임처럼. 이제 시작하는 거다!
나는 경기도민이다. 대학 생활 내내 서울로 통학을 했다. 하루 1/6을 버스와 지하철에서 보내면서 ‘귀가’라는 특기를 얻게 됐다. 처음 일 년은 그저 다녔고, 2년째에는 화와 분노를 얻었다. 모르는 사람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게 소스라치게 싫었다. 3년이 다 되었을 때에는 체념했고, 4년 차에는 갑작스레 터진 코로나와 함께 버스 여정마저 여행처럼 즐길 수 있게 됐다. 지난 육 년 간의 단련을 통해 어디든 갈 수 있는 넉넉한 도민 마음을 가지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자주 한강을 건넌다. 열 개의 약속 중 아홉이 서울이라서다. 을지로, 망원, 이태원. 오늘은 신촌이다.
사람들은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무얼 할까. 지난 몇 년 간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하다(경기도민의 자문을 요청합니다).
1) 잔다, 2) 휴대폰을 한다, 3) 취했다, 4) 입석으로 서서 멍하니 앞을 응시한다, 5) 책을 읽는다, 6) 옆사람이랑 대화를 하거나 전화를 한다.
말고도 누구는 다른 사람에게 훈수를 두기도 한다. 또 굳이 대중교통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누구냐고? 나다. 신기하게도 나는 버스에서 일을 참 잘하는 편이다. 40분 내지 1시간의 제한시간이 있어서일까. 꽤 자주 노트북을 펼쳐 문서나 디자인 작업을 한다. 자리가 없지만 무척 바쁠 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버스 뒷문 계단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노트북이 아닌 휴대폰으로 한다는 점이 조금 다르지만, 버스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동 과정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기도 한다. 우연히 같은 버스에 타게 되거나, 환승을 하면서 만나게 되거나. 방금도 그랬다. 거진 3년을 못 보고 지낸 학교 선배를 <서울백병원 안중근 활동터>에서 만났다. 다음 만남을 구두로 약속하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우연’이 주는 압축된 반가움이 남은 이동거리 내내 여운으로 남는다.
몇 주 전에는 이대역에서 캐주얼한 예술가를 만나 집으로 함께 돌아왔다. 스스럼없이 편한 사람이라 마치 함께 집에 돌아오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을지로 입구를 지나 빨간 버스를 탔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약 0.2배 멀게 느껴지는 편인데, 이렇게 반가운 일행을 만난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처음 십 분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신기하게 만난 것을 더욱 신기해한다. 그러곤 나누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하나둘씩 풀어놓는다. 내가 만났던 캐.예의 경우엔 실제로 전날에 이미 만났던 사이였는데도 그러했다. 이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남산터널을 지나친 것도, 판교 IC를 통과한 것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우연히 만난 그가 풀어낸 삶의 조각들을 두 손에 쥐고 한껏 가벼운 걸음으로 발을 옮길 뿐이다.
신촌역에 도착했다. 십 분 전의 반가움을 뒤로하고, 이제는 또 다른 데시벨로 만날 새 친구들을 향해 갈 차례다. 자, 그럼 안전 도보! 잠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