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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주 Apr 18. 2020

시인의 마음과 수도승의 묵묵함으로

영화 <패터슨>을 보고

패터슨. 그는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기사다. 매일 아침 6시 10분에서 30분 사이에 눈을 뜬다. 알람조차 없는 침실에서 그가 일어나 제일 먼저 확인하는 건 손목시계다. 우유를 아주 조금 넣은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아내가 전날 준비해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길에 오른다. 일주일에 5일, 그는 패터슨 시의 23번 버스를 운전한다. 오후 너덧 시면 다음 기사와 교대하고 퇴근한다. 아침에 걸었던 길을 그대로 돌아와 집에 도착한다. 그가 매일 손보는데도 우체통은 오늘도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다. 그는 우편물을 빼들고 우체통을 반듯이 세운 뒤 신발로 단단히 다져놓는다. 아내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개 마빈을 산책시키러 집을 나선다. 동네 바 앞에 개를 묶어두고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이것이 매일 반복되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7박8일 전부다. 


아니, 사실은 더 있다. 그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 아침 점검을 하러 동료가 버스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는 잠시 노트에 시를 쓴다. 아침에 들었던 상념을 옮겨적는 데 불과할지라도. 그는 분명 단어를 떠올리고 갈무리하고 하나의 구절로 만든다. 매일 버스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의 대화를 들으며, 아내가 싸준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그는 시를 떠올린다. 어제와 같은 경로의 퇴근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가 자신이 썼다며 들려준 시 한 구절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시를 쓴다. 느지막이 들른 바에서 자신이 시킨 맥주 한 잔을 바라보다 또 한 줄을 끼적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내게도 예술가에 대한 편견이 있다. 무책임하고, 자기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으며, 게으르고 충동적일 거라는 선입견. 반짝 하는 찰나를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입히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들일 거라는 생각. 예술가에도 차악과 최악이 있다면, 시인은 그중에서도 최악이지 않을까. 한국인의 애송시 목록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한 시를 남겼지만 평생 여자 문제로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린 시인 하며, 출판 계약금을 받자마자 탕진해버린 채 차일피일 탈고를 미루다 잠적해버린 시인들도 여럿 있다.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들으며, 애초에 시인에게 성실함을 바라는 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남자들이 술을 마시지 않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영화 <패터슨> 속 패터슨을 예술가라 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패터슨보다 아내 로라가 더 일반적인 예술가형에 가깝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로라는 오늘은 컵케이크를 구워 온 나라를 들썩일 파티시에가 되는 날을 꿈꾸고, 내일은 새로 산 기타를 가지고 전국 최고의 컨트리싱어가 되기를 꿈꾼다. 직접 페인트를 칠해 커튼과 식탁보 무늬를 매일 바꾸고 그 흥분을 퇴근한 패터슨에게 생생히 전달하려 애쓴다. 그러나 로라의 꿈은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없다. 그녀의 꿈은 패터슨의 금전적, 심리적 지원이 없으면 홀로 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라는 매일 패터슨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얻어내고, 이해받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예술적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타자에 기대어 이루려 할 때, 그 예술은 자기위안밖에 되지 못한다.


반면 패터슨의 일상은 예술가보다는 수도승에 가깝다. 그는 강박적으로 기계를 멀리한다. 스마트폰도 없고, 아이패드는 더더욱 없다. 그는 시를 쓴다. 그러나 한사코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써놓은 시를 묶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시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갈 행위다. 그저 관찰과 기록이 있을 뿐이다. 아침을 먹으며 무심히 본 성냥갑이, 아내가 싸준 도시락통의 브랜드가, 그에겐 시의 씨앗이 된다. 로라와 달리 그는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다. 시를 쓴답시고 동료가 버스 문을 두드리는 걸 막지 않는다. 언제든 끊고 다시 이어갈 수 있다. 온전한 예술은, 역설적으로 거기서 탄생한다. 


패터슨이 시작(詩作)의 원천으로 삼는 예술가가 있다. 패터슨과 마찬가지로 패터슨 시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다. 그 또한 내과의사로 일하며 평생 시를 썼다. 


내리막

  _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절망으로 가득하고 

      이룬 것 없는

                  내리막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절망의

역전逆轉.

      이룰 수 없는 것,

사랑받지 못한 것,

       기대 속에 놓쳤던 것을 위해-

                     내리막이 뒤따른다

끝도 없이 멈출 수도 없이.



사는 게 한없이 지겨워질 때가 있다. 아직 서른 하고도 몇 살 더 먹었을 뿐인데 벌써 그렇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는 겹겹의 반복만이 남은 생의 전부이지 않을까 하는 아찔함. 그렇다면 지금 뭐라도 다른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멀쩡하게 출근하다가도 충동적으로 다른 역에 내리고 싶었던 적도 여러 번이다. 꿈이 먼저가 되면 일상이 초라해진다. 일상은 일상대로 빛나고 있는데도, 이미 멀어버린 눈은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반짝이는 찰나의 무언가를 찾고 싶은 마음과 묵묵한 삶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조급증이 일 때, 이제 나는 패터슨을 떠올릴 것이다. 매일의 단상을 그러모아 몇 줄의 시로 남기는 일상의 예술가. 비슷하면서 다른 저마다의 리듬은 거기에서 생긴다. 시인의 마음과 수도승의 묵묵함으로 일상을 살아낼 때, 우리의 일상은 비로소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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