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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은주 Apr 18. 2020

‘짝’이 아니라 딴짓 시스터즈라니까요

독립출판잡지 <딴짓매거진>의 탄생

퇴사한 지 일 년 만에 해봄에게 연락이 왔다. 해봄은 마리텔 ‘모르모트 피디’로 이제는 준 셀럽이 되어버린 나의 입사 동기다. 해봄은 내게 자기 친구를 좀 만나보라고 부탁했다. 


“공기업에 다니다가 갑자기 퇴사를 한다는 거야. 지금은 한 달 휴직 상태인데 그간 관심 있던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더라고. 출판계 쪽에 아는 사람이 있냐는데 내가 아는 출판계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잖아. 만나서 이야기 좀 해줄 수 있어?”


그 여자와 나는 일주일 뒤 고속터미널 지하 쇼핑몰에서 만났다. 토요일 오후, 사람으로 빼곡한 신세계백화점 폴바셋의 귀퉁이에 마주앉았다. 오후에 결혼식이 있다던 그녀는 빼입은 결혼식 복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다이어리를 꺼냈다. 거의 벽돌 두 장을 합쳐놓은 것 같은 두께였다. 기억보다는 기록을 믿는 사람이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펼치자마자 출판사의 조직 구조도를 물었다. “사실 대개의 출판사는 구조랄 것도 없어요. 너무 작아서. 그나마 우리 회사를 기준으로 하면 편집부, 마케팅부, 디자인팀, 관리부, 영업지원부, 경영지원부, 제작부, 저작권팀…” 대답을 듣더니 대뜸 연봉을 묻는다.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연봉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되레 내가 먼저 물었다. 


“공기업 연봉은 얼만데요?”

“제가 지금 칠 년차인데 연봉이 세전으로 육천 정도 돼요. 우리 회사가 많이 주는 편이에요.”

“그렇게 높은 연봉 받으면서 왜 그만두려고 하세요?”

“우리 회사는 한 번 들어오면 아무도 그만두지 않아요. 다들 그걸 알아서, 아무리 더럽게 굴어도 못 나간다는 걸 알아서 같이 더러워지거나, 아니면 정치 싸움에서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돈을 받는 것보다 일이 쉬워요. 사실 나는 한 시간 안에 10을 처리할 수 있는데, 제가 매일 받는 일은 5 정도예요. 그럼 저는 그걸 아홉 시간으로 쪼개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하루만큼의 일을 해내죠. 그럼 내가 여기에서 시급 얼마를 받으면서 내 젊음을 낭비하고 있는 건가 생각해요. 그 시급이 내 젊음을 낭비할 만한 돈인가. 얼마 전엔 신입사원이 들어왔는데, 환영회 자리에서 이러는 거예요. ‘앞으로 40년간 여기에 뼈를 묻겠습니다!’ 새하얀 얼굴로 얼마나 숙연하게 외치는지, 여기에서 40년간 서서히 늙어갈 일만 남았다니, 갑자기 아연해지더라고요. 마치 산 채로 죽어가는 느낌이에요.”

“생각은 그렇게 해도 그만두기는 어렵더라고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한 달간 지내보고 결정하려고요.”


그 여자는 내게 퇴근은 언제 하는지, 퇴근 후에는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거의 여섯시에 퇴근하며, 회사가 파주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 도착하면 일곱시쯤 된다고 했다. 요즘에는 독립 출판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수업을 듣고 있다고. 알고보니 그 여자는 그 독립출판 수업의 행정 지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여자가 다니는 회사가 문화공간을 운영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 사업의 지원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출판 하실 거예요?”

“음… 하곤 싶은데, 누구랑 같이 만들면 좋겠는데 딱히 그럴 사람이 없네요.”

“그럼 저랑 같이 해요!”


나는 얼떨결에, 그날 처음 본 여자와 같이 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 여자는 에너자이저를 넘어 로켓 추진체였다.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아직 정거장에 채 닿기도 전에 그 여자는 네이버 카페를 개설했다며 내게 주소를 보내왔고, 다음주 토요일에 합정동의 카페에서 만나서 기획 회의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스물아홉 살 일 년 내내 혼자 궁리하고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것들이 갑자기 힘을 얻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딴짓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5년 후까지 별의별 일을 다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달 뒤, 우리 둘은 한강진역 2번 출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전 위아래 녹색 옷을 입고 있어요.’ 연두색 니트와 카키색 바지를 입은 한 여자가 도착했다. 비가 내리는 3월의 쌀쌀한 봄이었다. 우리는 종종걸음으로 근처 카페에 갔다. 


“포토샵이랑 일러스트레이터는 다룰 줄 알아요. 인디자인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모연’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여자는 아주 마른 편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마른 여자는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얇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두번째 퇴사를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장이 완전히 스크루지형이에요. 베풀 줄 모르고 직원들한테 아쉬운 점만 말하는 스타일. 그날도 화가 나서 퇴사할 마음을 굳히고 있는데, 옆자리 대리님이 갑자기 너 잡지 안 만들래? 내 친구가 잡지 만들고 싶다는데 디자인할 사람이 없대, 라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퇴사하는 마당에 뭐라도 해보면 재밌겠다 싶어서요.”


우리는 그녀를 바로 카톡방으로 초대했다. 우리에겐 온라인 회의였지만 그녀에겐 대화 겸 간보기였다. 쉴 새 없이 올라가는 대화를 보고 그녀는 약간 겁에 질렸다고 한다. 후에 들은 말에 의하면 ‘통통배에 탄 두 명이 자기더러 탈 거야, 말 거야? 당장 결정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그녀는 얼결에 통통배에 탑승했다. 독립출판이 뭔지, 잡지가 뭔지, 출판이 뭔지도 모른 채. 


2015년 3월에 만난 여자 세 명은 2015년 9월에 잡지를 만들었다. 이걸 만들기 전까지 서로 아는 사이도, 건너건너 한 번 만난 적도 없는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여자 셋이 서른둘, 서른셋, 서른넷이 될 때까지. 독립출판이 뭔지, 잡지가 뭔지도 모른 채 만든 ‘독립출판 잡지 딴짓매거진’은 2019년 12월 현재까지도 발행되고 있다. 출판사에 다니는 나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않고 1호, 2호, 3호라고 필명을 정했다. 당시에 방영되던 <짝> 같다며 사람들은 웃었지만 우리는 진지했다. 저희는 ‘짝’이 아니라 ‘딴짓 시스터즈’라니까요. 저희는 독립출판 잡지를 만들고 있고요, 그러니까 독립출판이 뭐냐면 우리가 쓰고 싶은 글을 자체적으로 출판하는 건데요, 그걸 누가 사냐고요? 글쎄요… 그건 저희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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