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섀도우 Aug 18. 2023

[프롤로그] 타임캡슐

https://youtu.be/AWSoTfBDkRY

Le Tombeau de Couperin -II Fugue. M.Ravel

모리스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 중 2번, 푸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라벨은 전후 오랫동안 작곡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죽은 친구들을 위한 여섯 곡의 모음곡, 쿠프랭의 무덤을 작곡하면서 그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다. 전사한 친구 장 크루피에게 헌정.





  사람들은 연예인들이 드라마와 영화 쇼와 같은 연출된 희로애락에 공감하고 위안을 얻는다. 재능있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의 실력만큼이나 탈락으로 교차하는 희비, 폴 포츠와 같이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진 자가 주목받는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의 축구 경기가 벌어지면 연고지 팀에 달라붙어 승리의 함성을 지르고 실책의 탄성을 자아낸다. 국가대표로 출전한 대표 선수의 세계 대회 우승이나 연예인과 감독의 입상에 국가적인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남의 성취와 행복을 나에 대한 행복으로의 투영이 둔감하다. 나는 월드컵 같은 세계대회, 국가대표의 우승이나 연예인들이나 가수들의 스캔들에 별로 관심이 없다. 최신가요는 유행을 따라가기 벅차고 누가 누구인지 몇 명인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 다들 비슷하게 느껴진다. BTS가 비틀즈를 능가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내 월급의 앞자리 수나 커피숍과 집과 병원을 드나드는 단조로운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연고지 축구팀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면 홀리건들의 광란의 파티가 벌어질 뿐, 나는 나이트 번 출근을 한다. 사람들이 모여 연예인과 드라마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침묵을 지키거나 어색하게 웃는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강박관념에 나는 범불안장애 진단을 받고 한때 약을 먹었다. 대신, 나는 내 스스로가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이 조잡한 그림 일기장이 그렇다. 


 사람들은 불행을 기피하고 병과 죽음을 막연히 먼 것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생사의 현장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불행, 안타까운 사연과 임종을 접한다. 나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끔찍(Grotesque)한 취미다. 나의 일기장은 전문용어와 잘난 체가 뒤섞인 - 스노비즘(Snobism)과 같은 글이다. 이 업계에 있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도통 알 수 없는 의료 행위에 대한 서술이 막연한 벽처럼 다가올 것이다. 사실 치료 과정에 대한 서술은 쓸모없는 묘사일 뿐이다. 의료 행위에 대한 군더더기 같은 서술은 단지 그들의 아픈 사연이 실재했음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군더더기 묘사어구에 불과하다.


 정보가 쓰나미가 몰아치는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갯벌에 파묻힌 진주마냥 당신들의 사연을 - 나는 몇 주에서 몇달, 때로는 일 년넘게 마음 속에서 다듬고 삭힌다. 나는 뛰어난 보석 세공인이 아니기에 당신들의 아픈 사연에서 탁한 바다의 부유물을 걷어내고 맨드러지게 닦아내고 어수룩하게 다듬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옅어진 기억으로 뭉개진 스케치는 사연 속 주인공들을 짙은 안개에 뒤덮힌 호수의 산책길마냥 두루뭉술하고 흐리게 보여준다. 나는 부족한 그림 솜씨로 기억의 단편을 크로키마냥 스케치한다. 사진은 현실을 박제하듯 너무 또렷하게 남는다. 언젠가 나와 당신, 우리가 마주할 현실이자 불편한 미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나는 두렵다. 나는 익명의 힘을 빌어 간호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비밀들을 나는 너무 쉽게 남들에게 떠벌린다. 남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가 내 모자란 글재주로 인해 눈물을 짜내는 저급한 신파극으로, 나에 대한 자랑과 유능함의 과시로 오독될까 두렵고 무섭다. 나는 겁이 많다. 


  나의 일기장은 위대한 음악가 애드워드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처럼,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에니그마는 아픈 사연 속 주인공들과 나만이 열어 볼 수 있는 자물쇠이다. 아픔을 겪었던 당신들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해 온 가까운 지인들 역시 이 비밀의 열쇠로 내 마음속을 읽고, 수수께끼를 맞추며 미소지을 지 모르겠다.


  <쇼생크탈출>의 레드는 가석방 후 앤디의 편지를 따라 어느 나무 아래 묻힌 타임캡슐을 파낸다. 녹이 슨 양철 뚜껑을 열고 족히 수십년은 지난 잡동사니들과 함께 뚜렷한 글씨로 미래를 향한 메세지가 적혀있다.


 나의 보잘것 없는 글솜씨로 기록된 당신들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몇십년 뒤에열려야 할 내용물이 부득이하게 열린, 세상에 나오기 너무 이른 타임캡슐과 같다.

  임상에서 겪은, 가슴 속에 삭히고 무던해질 때 까지 묻어두었던 사연들이 모자란 글솜씨로 옮겨져 보잘것 없는 양철 캔에 차곡차곡 쌓인다. 분량이 너무 적은 기억의 단편 조각이거나, 때로는 담아둘 수 없는 너무 아픈 것들은 수많은 고민 끝에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상자를 열었을 때, 색이 바랜 사연 속 주인공들은 아픔을 극복했거나, 혹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 '그땐 그랬지'라고 미소지으며 넘어갈 수도, 세월과 일상의 풍파에 잊혀졌던 소중한 이가 떠올라 울음을 터트릴 수도 있다. 타임캡슐이란 그렇다.



인생의 마침표를 겪었던, 모두에게 이 글을 바치며.

매거진의 이전글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