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예비군 훈련 시즌이 오면서 국방의 의무를 짊어졌던 젊은이들이 오랜만에 장롱에 잠들어 있던 군복을 꺼내 입어본다.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현역 시절 다부진 체격에 맞춰 입었던 군복 단추가 닫히지 않고, 결국은 앞섶을 풀어 헤쳐 입는다. 더부룩한 머리숱에 휘항찬란하게 장식된 전역모를 눌러쓰고 입영지로 가는 30분,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오는 버스 정류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다. 세상에, 예비군 훈련장에 오면 허리까지 머리를 기른 장발의 '군필 여고생'들을 보게 된다.
단촐한 부대창설식과 함께 동원 예비군 아저씨들은 현역병들과 합을 맞추어 현역일 때의 보직에 맞추어 2박 3일 간 정훈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오랜만에 먹는 병영식(=짬밥)의 말라 비틀어진(?) 조기구이를 보노라면 생업을 뒤로한 채 입대한 아저씨들에게 현역병 시절의 추억과 만감이 교차한다. - 다행히 해물비빔소스는 퇴출됐다.
애연가들에게 동원훈련만큼 담배 마려운 순간이 없을 것이다. 담배꽁초가 널브러진 흡연장에 현타가 쎄게 온 아저씨들의 매캐한 연초 연막이 피어오르고, PX앞에 복도를 가로지르는 대기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전 처음 보는 생활관 예비역 부대원들끼리 서로 안면을 익히고 각자 자신들이 몸담았던 부대의 전설적인 무용담을 나누며 병영의 밤이 깊어진다.
병장 출신은 3년, 장교 부사관은 6년의 예비군 동원 훈련이지마는 지난 3년 간 코로나19로 인해 동원 훈련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3년을 쉬고 오랜만에 동원되어 보건데, 근 4년 간 세습되어 온 군기빠진 예비군 아저씨 문화가 많이 희석되어 좀 더 적극적이고 절도있으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의 인구가 가파르게 줄고 있다. 2022년 출산율 0.78명, 학생이 사라지며 임용되지 못한 교사들이 늘어났고, 벛꽃 지는 순서대로 지방부터 대학들이 존망의 기로에 섰으며, 전방 부대중에 사라지는 부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육아 부담, 교육비, 취업의 난항, 하늘높은 줄 모르는 집값. 1회성 지원으론 턱없이 불가능한 생색내기 복지와 '헬조선화'에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고, 혹은 결혼을 포기한다.
국방부 역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현역 복무기간이 줄었고, 현역병 입영 인구 자체가 줄었다. 결국 부대를 기계화하여 감축 인력을 커버하고, 예비군들을 철저하게 훈련해서 다가오는 국제 정세의 위협에 대비할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이웃 국가들은 '미친' 국가들밖에 없다. 언제든 핵버튼을 만지작 거리는 북한은 심심하면 미사일을 발사하고, 일본은 아직도 제국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침략 가능한 국가로 헌법을 바꾸려 한다. 체급만 믿고 약소국을 돈과 무력으로 괴뢰국화 시키는 중국은 타이완 침공 훈련을 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에 젊은이를 갈아넣고 있는 푸틴은 러시아를 실시간으로 망가트리고 있다.
국방부의 정훈교육 말마따마, 예비군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다. 우리는 이미 힘없는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유린당하고 수많은 고통과 피해를 겪었음을 안다. 한국의 일제강점기가 그랬고 폴란드가 그랬으며,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그렇다.
한때 근대 유럽의 강대국이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8세기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사라졌고 1차대전 이후 간신히 독립했으나 나치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전후 소련 치하 공산화된 폴란드는 소련의 괴뢰국으로 신음했다.
사실 폴란드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한 폴란드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폴란드의 교사, 대학생 등 엘리트 지식인들은 모두 예비군 장교, 부사관으로 임관했다. 유사시 전투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전력이었다.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과 나치 독일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악랄한 소련은 폴란드를 침공한 뒤 폴란드 포로 병사들은 석방하고 장교단들을 감금했다. 포로 개개인의 정치 이념 성향을 심문하고 소련에 반기를 들 위험이 있는 반동 분자들을 카틴, 키이우, 하르키우, 헤르손의 숲으로 끌고 가서 처형한다. 소련은 엘리트들만 골라 학살함으로서 치밀하게 한 나라의 민족의 정기를 흐트리려 했다. 일본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2022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벌어지면서 폴란드가 독이 바짝 올라서 군수물자를 바득바득 긁어모아 우크라이나를 팍팍 지원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폴란드는 민족의 지식인들이 학살당한 자신들의 역사를 잊지 않았다. 과거 조국이 반으로 갈라져 죽는 동안 손가락 빨던 다른 선진국들에 대한 원한, 우크라이나가 밀리면 바로 자신들이 러시아와 대치한다는 점, 마침 군 현대화도 필요했는데 구닥다리 구소련 군수품을 털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한국에서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이유긴 하지만. 카틴 숲의 학살은 한민족과 같이 자주국방의 절실함이라는 폴란드 민족에 새겨진 한맺힌 사명이 아닐까.
참고자료 및 사진 출저
Katyn's Forest and the 22,000 bullets that no one heard (historiesdeuropa.c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