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우린 우산이 없었기에 호텔 라운지에서 우산을 하나 빌리고(보증금이 20유로였따...) 가까운 모노프리(Monoprix)에 가서 우산을 살펴본다. (모노프리 이야기는 후술)
한참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노파 어르신이 우산을 보시더니 "여기(모노프리) 우산들 품질이 좋다" 하셔서 그냥 그 자리에서 구매. 작고 아담하고 귀여운 우산도 20유로(약 3만원)였다.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는 길.
버스를 타기 위해 결국 우리는 숙소 근처 지하철역 샤를 미셸(Charles Michels)역에서 카드를 만들고 충전했다. 진작에 카드 살 걸...
다리 건너 72번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저 멀리 에펠탑이 보인다. 안개와 구름낀 날씨에 에펠탑의 머리가 구름 속에 쓩 들어가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 이래로 철천지 앙숙이자 경쟁자였다. 미국이 식민지전쟁으로 영국에게서 독립할 때 프랑스는 영국에 고춧가루 뿌린다는 마인드로 미국의 독립을 도왔다. 그러면서 어찌저찌 프랑스 혁명의 자유 이념이 미국에 이식된 것은 덤이었다. 프랑스는 신생 독립국에 거대한 조각상을 선물했는데, 감동받은 미국 역시 답례품으로 미니어처(...)를 보내주었다. 센 강 어느 다리 가운데에 위치한, 이 아담한(?) 자유의 여신상의 유래는 내가 아는 게 이정도다.
72번 버스를 타고...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궁전이었는데 혁명기를 지나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고 한다. ㄷ자형의 기본 구조 뒤쪽으로 ㅁ 자형으로 증축을 거친 루브르 박물관은 전고가 높은 3층에 수많은 조각과 장신구들, 유명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궁전 한 가운데 유리로 세워진 피라미드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지하로 들어가기 전 테러 예방을 위한 x-선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는 줄이었다. 나라 전체가 문화재로 덮여있는 나라답다고 할까.
입장료는 인당 22유로(약 3만 7천원), 넘 비싼 거 아니냐고... 점점 값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 편으로는 이 수많은 유물들을 관리하는데 미어터지는 관광객 수입으로 부족한 재원 충당을 하려고 하는 거니...
오디오가이드는 6유로였는데 닌텐도랑 헤드셋은 무겁기만 하고 불편하고 별로 쓸 데가 없었다. 그냥 길찾기 머신이었다. 비추천...
루브르의 입구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학생들이 이리저리 걸터앉아 조각상을 뎃셍하고 있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석고로 복제된 아그리파 얼굴을 뎃셍하는데 프랑스 학생들은 박물관에서 원본을 대고 뎃생을 한다고! 이 엄청난 사치(?)에 부러움을 느끼며 박물관 견학 시작.
앗 아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은 보수 작업으로 들어가서 볼 수 없었다... 아쉬워라.
"그 그림"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사실 모나리자가 왜 이렇게 유명한 지 나는 잘 모르겠다. 유명인의 인스타 릴스 같은 스트라이샌드 효과인건가 아니면 노이즈 마케팅인 걸까. 나는 오히려 프랑스 혁명기의 그림들이 더 인상깊었다.
혁명의 희생자들과 나폴레옹의 초상, 그리고 황제 대관식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왕의 목을 자른 민중들의 혼란을 제압하고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주변 왕정 국가들을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역으로 제압하고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에 대들었으나 해군력에 무참히 깨지고 무리한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했다. 유배되었던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한타 병력을 모아 치른 워털루 전투에서 부관들의 엉망스런 전투와 불운,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한다. 나폴레옹은 죽을 때까지 대서양 망망대해의 한 섬에 유배된다. 그는 죽어서야 팡테옹을 지나갈 수 있었다.
돌격하는 사쇠르(경기병)
민중을 이끄는 영웅이라 생각했지만 보나파르트는 무한한 전쟁으로 체제의 불안을 해외로 투사하는 독재자였을 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다는 소식에 도이치의 어느 귀머거리 음악가는 그에게 헌정하려 했던 악보를 찢어버렸다.
물론 나폴레옹이 무리한 전쟁으로 결국 나라를 말아먹는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폴레옹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근대적인 법의 개선 및 제정이다. 그가 만든 프랑스 민법전은 지금도 프랑스에서 손 봐가면서 쓰고 있으니까.
신들의 회화
서양 미술사에서 신들을 제외하면 얼마나 많은 걸 이야기하지 못할까. 각 요일은 그리스 신들(혹은 북유럽 신들)의 이름을 빌려 붙였고, 하다못해 역법조차 예수의 탄생으로 기원전/후를 나눈다. 최소 천 년의 중세 동안 가톨릭 교회의 교리 하에 문화가 발전해 왔고, 르네상스와 종교전쟁 등을 겪으며 미술 회화는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탈바꿈한다.
아벨을 죽이는 카인.
기독교 성경 신화에 얽혀있는 유럽인들에게 태초의 살인이란 형제 살인이다.
야훼께서는 농작물의 일부를 바친 카인보다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친 아벨을 편애했다. 카인은 아벨을 질투했고 돌로 쳐 죽였다. 야훼가 아벨이 어디갔느냐 추궁하자 카인은 발뺌했고, 야훼는 그런 카인에게 땅에서 작물이 나지 않게 하며 영원히 떠돌아 다니니라 저주한다. 그러나 카인은 도망쳐 성을 쌓고 농경 사회를 일구었다.
창세기의 수많은 오류를 감안해도, 농경으로 정주하는 타 민족(카인의 후예)이 아닌, 유목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야훼의 총애를빗대어 말한 것일까? 역동적인 근육의 혈관, 공포와 절망에 젖은 아벨의 눈빛이 애처로운 작품이었다.
에로스와 프시케(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작) / 그랑드 오달리스크
이브, 프시케, 그리고 런...
그리스도교 만큼 서양사에 영향을 끼친 문화는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가 있다. 수많은 그리스 지역의 토속 잡신(?)들의 설화가 한데 얽혀 신전을 이룩했고, 트로이 전쟁으로 신들의 혈족들이 대량으로 떼죽음 당하면서 신력이 약화되었을까. 고대 이탈리아 반도의 늑대의 쌍둥이 자손들이 공화국을 일구었을 때 그리스의 유민들이 유입되면서 현지화되어(제우스->주피터 등등) 로마 초기의 신으로도 잔존했으나 가톨릭이 오랜 탄압을 이겨내고 국교화되면서 신력을 잃었다.
반전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조각과 회화 모두에서 고대 그리스의 아름다움이 복원되고 그리스 신화가 부활한다. 벌거벗은 나체의 남녀의 아름다운 육체미를 뽐내는 데 인간이 아닌 신격인 존재의 묘사로 외설이라는 비난을 빗겨갈 수 있었으리라. 이후로 신격이 아닌 평범한 인간 나체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19세기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같은 그림은 관람객들이 우산으로 찍어대싸서 맨 위에 걸어놓곤 했다.
메두사 호의 뗏목
그림 안에 궁전의 그림 안에 그림.
세상에... 그림 속 인물들이 그림을 그리는 생동감과 섬세함이 이목을 끄는 그림이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 자체를 상징하는 그림같다고 할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녀와 나는 프리셉터, 프리셉티 관계였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근무가 끝나고 술 없이 안주로 저녁을 먹으며 호프집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가 나에게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목걸이에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이라 적혀 있었는데 나는 데카르트의 명언이라 답했다. 그녀는 나의 이런 소소한 지식에 놀라워했다. 새벽 네시, 가게 문이 닫히고 우리는 아쉬운 발걸음을 헤어졌다. 11월. 그 해 첫 눈이 내렸다.
이후로 나의 고백을 받아 준 그녀는 2년 간 알콩달콩 사랑을 일구어 마침내 결혼하고, 그녀가 목걸이에 문구를 새겨 지니고 다니는, 사색하던 그 철학자의 초상 앞에 섰다. 데카르트가 맺어 준 정말 신기한 인연이다.
램브란트의 그림은 투박하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있다. 기존의 그림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그리는지, 섬세한 묘사에 집중했다면. 렘브란트는 어두운 배경에 유화 특유의 물결치며 흐트러지고 보정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을 보여준다.
루브르 '궁전'
저 천장 위까지 올라가서 그림 그리느라 목 좀 많이 아팠겠다 했다. 괜히 미켈란젤로가 성당 천장화 그리다가 도망친 게 아니다.
거진 5시간 동안 박물관에 갇혀서 탈출하지 못했다. 수많은 이름 모를 조각상들과 그림들에 둘러싸인 이곳은 미술학도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 아닐까. 미술에 무지한 우리는 '오 정말 예쁘다' 정도의 짤막한 감상평이지만.
박물관 출구는 지하였는데 지하 복도 전체에 수많은 기념품관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고 기념품들을 구경하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깃발을 펄럭이는 머그컵을 하나 샀다.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는 드 골이나 보나파르트 같은 독재자의 국가가 아닌, 부정부패에 삘받으면 뒤집어 엎고 일어서는 시토이엥(Citoyen)과 코뮌(Commune)의 나라다.
으슬으슬한 파리의 저녁
저녁 18시, 루브르에서 나와 근처 식당을 갔는데 19시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기에 우리는 근처 시테(Cité) 섬에 들르기로 했다. 시테 섬과 이어진 두 개의 퐁네프 다리를 건너다 너무 추워서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뼛속까지 시린 나머지 오늘도 양 어깨가 아프고 배가 뒤틀린다. 파리에서 기관지염에 폐렴에 골골댔던 쇼팽도 이렇게 고통스러웠겠지. 한참 동안 추위에 뒤집힌 배를 움켜쥐다 오데옹(Odéon)역까지 간신히 걸어가서 처음으로 전철를 타기로 했다.
파리의 던전, 지하철
악명(?)에 비해 지하철은 쾌적했다. 그래피티 심심이들은 지하철 문짝에도 낙서를 해놓고 지하 동굴 모양새 자체가 오래되서 던전 감옥 처럼 느껴질 뿐이지.
처음 타본 지하철이었는데 당연한 듯이 열리지 않는 수동 개패문을 보고 좀 놀라고 다이얼을 딸깍이자 바로 문이 덜컹 열리는 구조에 더 놀란다. 이 짜릿한(?) 손맛은 두고두고 기억나게 된다.
두근두근 저녁식사
숙소에서 몸을 녹인 우리는 가까운 가게들을 찾았고, 샤를 미셀 역 근처에 가정식 식당을 찾아 들어왔다.
메뉴판을 한참이고 외우듯 쳐다보다 드디어 '그 달팽이 요리'(Escargots de Bourgogne)와 양파 스프를 시켰다. 홈 와인과 함께 우아하게 시작.
에스카르고의 깊은 향신료맛, 녹색 바질향이 입안에서 푹 스며든, 조금 더 쫄깃한 골뱅이살 같은 맛. 부르고뉴 지방에서 처음 시작해서 부르고뉴 달팽이 요리란다.
그리고 여태껏 먹어본 스프중에 제일 짭조름하고 따뜻하고 맛있는 양파 스프... 눅눅하게 젖은 바게뜨빵에 스며든 스프 국물은 추위를 녹이는 맛이다. 정말 너무 추웠는데 이때 먹은 양파 스프에 감복해서 프랑스 여행 내내 양파스프만 생각났다. 진짜 한국에 돌아와도 잊혀지지 않는 양파 스프의 맛이었다. 꼭 한국서 해먹어본다.
쇠고기 스테이크와 오늘의 생선! 무슨 생선인지 몰라 스마트폰으로 입력해달라고 했는데 직원분이 키보드를 보고 쩔쩔매는 게 아닌가. 알고보니 프랑스는 QWERTY키보드가 아닌 AZERTY 키보드를 써서 자판이 헷갈렸던 것 같다. 생선은 농어, bar(바ㅎ)라고 발음했다.
한국이었으면 냉장고 한 두 칸에 유제품이 차 있을텐데 여기는 그냥 유제품이 냉장고 몇 칸을 차지하는 지 모른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다! 괜히 낙농업, 유제품의 천국이 아닐까.
모노프리 말고도 까르푸(한국에서 철수한 그 까르푸 맞다!), 오셩(Auchan, 오숑), U(systeme U), 프랑프리(Franprix), 리들(Lidl) 등등 엄청 많이 있는데, 모노프리 > 프랑프리 > 까르푸 > 오셩 > 리들 순으로 점점 저렴해진다고 한다더라. 근데 파리 시내에선 규제 때문이라 들었는데 대형마트는 없어서 2층 정도 점포 크기가 거진 최대 크기였다.
어차피 관광객으로 온 우리가 가격 크게 따질쏘냐 싶냐먀는, 숙소서 제일 가까운 매장이 모노프리였고 여행 내내 애용하게 됐다.
그리고 파리 유학생이 귀띰해줬는데 푸드 코너서 초밥 사지 마세요... 12피스에 42유로 넘음(6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