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조식은 항상 맛있어
치즈와 감자와 소시지와 빵을 꾸역꾸역 먹을 수 있는 든든한 아침식사. 호텔조식의 좋은 점은 치즈와 유제품을 잔뜩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여행 내내 변비로 고생할 일이 없다.
오늘도 엄청 걸을 예정이다.
새벽 7시 반 즈음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고오니 그새 해가 떠오르고 맑은 날씨였다. 오늘은 몽마르트 언덕과 팡테옹을 관람하기로 했다.
앗... 비흐하킴(Bir-Hakeim,비르-하킴)역에서 6호선 전철을 타고 가려고 했는데 뭐지... 문을 닫았네?
이렇게 전철 개보수 사유 등으로 말없이 문닫는 역들이 하나둘 있다고 한다.
파리의 조깅 빌런들
어쩔 수 없이 다리 건너 다음 역인 빠씨(Passy)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비와 눈으로 도로는 질척하고 미끄러운 빙판이라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었다.
세상에, 영하 2도의 날씨였는데 저렇게 맨다리에 반바지만 입고 조깅하는 빌런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얼어죽어도 패션이라는 파리지앵인가... 파리를 여행하는 나는 꽁꽁 싸매고도 추워서 온몸이 뒤틀렸는데 말이다.
사흘 내내 반팔 조깅까지는 봤는데 저 빨간티 맨다리 조깅빌런을 이길 수가 없다.
비흐하킴 다리를 건너다 사진 한 장.
다리 중앙에는 잠시 쉼터같이 튀어나온 곳이 있었고 이곳이 바로 포토 스팟이었다. 한국인 커플 혹은 신혼부부로 보이는 두 쌍이 사진사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비흐하킴(비르하킴) 전투는 1942년 5월 27일부터 6월 11일까지 두 개의 적 사단의 맹렬한 공격을 물리치고 자유 프랑스가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음을 세계에 알렸다"
비흐하킴 역과 다리는 2차 세계대전 때 리비아 사막의 비흐하킴 지역에서 치열하게 항전했던 자유 프랑스 여단이 롬멜의 치열한 공세를 막아낸 용기와 희생을 기념하고 있었다.
귀여운 타이어 전철 6호선을 타고 끌레베르(Kléber)역에서 내려 환승해서 앙베르스(Anvers)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여기로 가시면 됩니다" 수준으로 사람들이 몰려있는 그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짠! 몽마르트 언덕과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우릴 반긴다.
날씨가 좋으면 성당 앞으로 펼쳐진 몽마르트 언덕 잔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겠지만, 겨울에는 통제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옆길에 있는 계단을 타고 성당까지 올랐다. 물론 그 옆에 노약자와 어린이, 소중한 무릎을 위한 비탈길 승강기가 있다.
12시 정각. 파리의 겨울은 해가 낮다.
"여기는 태양이 낮아요"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영상통화로 이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을 보여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킹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겨울의 소중한 햇빛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대성당이지 않을까, 사크레 쾨르 대성당
바실리크 두 사크레 쾨르(Basilique du Sacré-Cœur)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의 패전 이후 사기 고취를 위해 성금을 모아 1870년 건설을 시작해 1914년에 완공된 신축 성당이었다. 다른 문화재들과는 달리 매우 가까운 시대에 만들어진 반질반질한 성당인데, 1914년은 바야므로 대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가 불타고 있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끝난 1919년 성당은 봉헌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들에게서 그리스도교로, 르네상스로 그리스 신들이 강림하고 종교전쟁으로 그리스도교가 분열했지만 20세기 가까이 유럽인들은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 전쟁이 터지지 전까지는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은 너무도 많은 것을 앗아갔다. 지성인이라 자부하던 유럽인들은 서로의 형제 자식들을 기관총과 포화에 갈아넣었다. 권력자들의 욕심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고 자식을 잃은 가족의 슬픔과 함께 참호에 가라앉았다. 대전쟁 이후 염세주의, 죽은 신의 시대가 시작됐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로 유럽의 신앙 인구는 가파르게 줄어들었다. 이 사크레 쾨르 대성당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후로는 아마 거대한 성당 건축을 보기 힘들 지도 모르겠다.
성당은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유이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던 곳이었기에 우리는 2.5유로를 헌금하고 양초를 하나 집어 불을 붙였다.
원래 이곳엔 더 오래된 성당이 있다
사크레 쾨르 성당 옆 담벼락에는 12세기에 지어진 옛 교회, 에글리즈 생-피에르 드 몽마르트(Église Saint-Pierre de Montmartre)가 있었다. 성 베드로의 교회(Église)는 사크레 쾨르의 후광에 가려져서 그런지 조용하고 아담했다. 전통적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 내부는 아치형으로, 현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신전터였다고 하는데, 프랑스에 가톨릭을 전파하던 생 드니(Saint Denis) 신부가 처형되면서 목이 잘린 채 이 언덕까지 올라와 숨을 거두면서 몽마르트 언덕이 성지가 되었다고.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베네딕트 수도회 건물로서 지어졌다고 한다. 예수의 수난을 새긴 정문의 청동문도 20세기 작품이라고 한다.
교단 위쪽은 신도와 성당 관계자들이 실제 사용하는 만큼 출입을 제한했기에 멀리서 구경하는 것으로 족했다.
노틀담 드 몽마르트, 2차대전 당시 폭격을 당할 뻔했던 성모상을 지키기 위해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노력함을 기리는 문구라는데. 몽마르트의 성모는 예술가들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로 앞 광장에 거리의 예술가들이 붐비는 걸까?
중세의 성당과 광장
유럽의 마을에서 성당과 광장을 빼놓을 수 없다.
유투버 '지식브런치'의 설명에 따르면 성당과 광장은 필수불가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마을이 생기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당인 성당 건축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현대와 달리 중세의 성당 건축은 길게는 수십-수백년이 되는 대사업이라, 성당을 지을 부지 앞에 거대한 제재소, 석공소, 수많은 건축자재가 널부러지게 된다. 그동안 성당 주변으로 집들이 지어지고 성당 건축이 끝나면 건축시설들이 들어섰던 공터는 자연스럽게 광장 역할로 바뀐다고.
https://youtu.be/ZbUX0mNdyn
생 피에르 성당이 남긴 공터는 테르투르 광장(Place du Tertre), 테르투르 거리가 되어 여행객들을 위한 화가들의 스케치 장소로, 비둘기들의 구구구 장소로, 분위기 잡고싶은 우리들의 커피 타임으로 멍때리는 공간으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우리가 들른 가게는 에스프레소 2.5유로였는데 빨간 차양 옆집은 4.5유로씩이라 받고 있었다. 관광객 바가지도 한바가지지 너무한 거 아니냐고...
프랑스 빵집은 어디든 맛있어
우린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관광 버스 마차가 다니는 골목길은 내리막길을 따라 계단식으로 건물들이 서 있었다.
사랑해 벽으로 유명한 아베쓰 광장의 담벼락은 보수공사로 막혀있다. 멀리서 간판 구경하는 것으로 끝...ㅠㅠ
출출해진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다 향긋한 향기를 맡게 되고 빵집을 발견했고, 사흘 내내 빵집에 가 볼 생각을 못한 우리는 간단한 요기거리로 빵을 하나씩 사보기로 했다.
작은 가게 안에는 이미 현지인들이 줄을 서서 빵을 고르고 있었다. 우리는 가판대에 적힌 프랑스어를 보며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뒤늦게 들어온 프랑스인 한팀에게 순서를 양보했다. 어줍잖은 영어와 프랑스어로 빵을 고르며 싱글벙글 가게를 나왔고 바게뜨와 치즈가 든 크로아상을 먹으며 추웠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너무좋아요!
신혼여행 끝나고 알았는데, 파리에 갔던 다른 선생님 왈, 여기 유명 맛집이란다.
ㅋㅋㅋㅋ 우린 유명한지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ㅋㅋㅋㅋ 그냥 프랑스 현지인들이 많이 가면 됨.
시테 섬, 노틀담 드 파리
빵 한입으로 한결 행복해진 우리는 아베쓰 역에서 전철을 타고 시테 섬에서 내렸다. 전날 저녁 때 잠깐 들렀던 시테 섬이지만 너무 춥고 어두워서 그만 포기했던 노틀담 드 파리를 보기 위해서.
불의의 사고로 불타버린 노틀담 드 파리... 관광객들이 멀리서 잘 보라고 반대편에는 계단식 간이 오르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음에 파리에 올 일 있으면 보수가 끝난 노틀담 드 파리를 볼 수 있겠지.
팡테옹으로 가는 길
시테 섬에서부터 팡테옹까지 걸어서 20여분 거리, 그 즘이야? 하면서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돔. 바로 팡테옹이었다.
마침 오후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프랑스 위인들의 무덤, 팡테옹
팡테옹은 원래 성당으로 건축되려고 했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고, 혁명 기간동안 희생된 자들이 안치되면서 성당 계획은 물건너가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마감되었던 창문은 벽돌로 막히게 되었다. 팡테옹의 정면은 로마의 팡테옹을 본따 그리스 양식의 거룩한 모습을 빗댔고, 내부의 기둥과 장식들도 마찬가지였다.
팡테옹의 입장료는 인당 13유로(약 1만 8천원).
팡테옹의 본관에는 푸코의 진자 복제본이 기동중이었다. 원본은 줄이 낡아 끊어져서 보관중이라고.
푸코의 진자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세차운동을 증명하는 유명한 실험이다. 이론상으로 진자는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끝이지만 실제로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바닥이 움직이면서 진자가 시계방향으로(남반구에서는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 사실 지구과학 1등급으로 간호사가 된 나도 원리는 잘은 모르겠다. 진자 운동보다 더 중요한 게 팡테옹에 있었으니.
지하로 내려가는 나선형의 계단
지하1층에 들어오면 양 옆으로 루소와 볼테르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세상에, 도시 한 가운데에 위인들을 안치한 사당에 세계구급 사회학자 거물 두 분이 마주보고 있다니. 이런 부분에서 프랑스가 참 부럽다고 느꼈다. 수도 한 가운데에 자국을 빛낸 위인들의 영묘를 만들어서 전세계적으로 먹고 들어가는 괴물들을 안치했다는 것이. 한국으로 치면 종묘에 들어서자마자 양쪽에 서애 류성룡, 연암 박지원의 위패가 있고 민주투사들의 무덤이 전시되어 있는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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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브라유는 세 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은 후천적 시각장애인이었다. 마을의 신부님의 도움으로 왕립 맹인학교에 다녔던 그는 돋음새김 된 문자의 불편함을 인지하고 여섯개의 점으로 된 점자를 개발해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시샘과 특수교사의 일자리를 위협한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견제로 그의 작업물이 손실되곤 했지만, 폐결핵으로 안타깝게 요절한 지 2년만에 그의 점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의 읽기에 대한 소망을 풀어준 그의 공로를 기려, 그는 팡테옹으로 이장되는 영광을 얻었다.
프랑스령 차드의 행정관(총독)이자 최초의 흑인 총독이었던 펠릭스 에부에. 할아버지는 노예 출신이었으나 그는 프랑스에서 그랑제콜을 나온 엘리트로 차드의 흑인 총독으로서 프랑스의 앞잡이 역할로 오해될 것 같지만, 아프리카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현지인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힘썼다고. 식민지를 다스려야 하는 총독이 식민지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는 것만으로 팡테옹에 안장되느냐...
사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망명정부였던 자유 프랑스를 지지한 몇 안되는 식민지 총독 중 하나였다. 덩달아 주변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을 설득해서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게 했다고.
빅토르 위고, 알렉장드르 뒤마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노예제, 부끄러운 역사와 마주할 용기
팡테옹의 한 켠 전시관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운반하던 노예선 미니어처와 흑인 노예의 역사에 대해 반성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프랑스에는 노예가 없다"는 1315년 왕국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발달한 안틸레스의 새로운 식민지에서는 "식민지 예외"라는 루이 14세의 칙령이 떨어졌다. 흑인 노예 '사업'을 위해서... 부의 욕망 앞에서 인간은 추악했다.
대항해 시대 이래로 수세기 동안 행해진 식민지 국가에 대한 폭력과 희생으로 일구어진 제국주의 국가의 조상들의 부와 사치는 이제 후손들에게 인종 갈등, 불법 이민 증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불과 1960년대만 해도 식민지의 독립에 가혹하게 대처하며 - 알제리 전쟁과 같은 끔찍한 참상을 생각해보자 - 이미지를 대차게 말아먹었던 프랑스는 21세기 들어 점차 타 인종들을 포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흑인 노예제에 대한 반성과 알렉장드르 뒤마와 펠릭스 에부에 같은 흑인 위인들이 팡테옹에 안장되기 시작한 것도 그런 기류일까.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상들의 악연을 딛고 화합되길 바라며.
관람이 끝나고 나오자 푸코의 진자는 한 칸 움직여 있었다. 여섯시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추천 맛집으로 가기로 했다. 물론 이 추위를 뚫고 걸어서.
아름다운 주광색 파리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며.
그런 식으로 장사하면 안돼지
그러나 추천받아서 간 곳엔 낙원은 없었다...
제 아무리 프랑스 문화로 웨이터가 지정하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예절이 있다지마는, 빈 자리가 그렇게 많은데 생판 얼굴도 모르는 남들과 더덕더덕 붙여 앉히는 웨이터가 정말 괘씸했다. 이미 옆쪽에는 유럽인과 붙어앉은 중국인 커플이 보였는데 여자는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이 울상이었다.
https://maps.app.goo.gl/aS61uu6nkJPga4hx8
가게는 예쁜데 사람 기분 망치는 서비스도 최고인 뷰맛집... 역시 구글 리뷰는 정확하다.
우리는 길을 잃고 추위에 떨면서 다른 가게를 찾기 시작했고...
한국과 인연이 있는, 호쾌한 셰프의 파란색 집
한참을 서성이다 작고 귀여운 가게를 발견했다.
서버는 유창한 영어로 메뉴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우리는 와인 두 잔과 낙지다리가 올라간 전채요리와 빠에아, 스테이크를 시켰다.
머리 희끗한 인자한 얼굴의 쉐프는 애연가셨다. 오후 7시면 프랑스 현지인들은 밥 먹을 시간도 아닌데 왠 당돌한 한국인 둘이 와서 이리저리 메뉴판을 탐독하는 게 그리 신기했을까?
알고보니 쉐프님이 요리 경연으로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22년도에 한국에서 모 유명한 쉐프와 함께 요리했다고. 누군지는 까먹었댄다 ㅋㅋㅋ 그러곤 머슥했는지 한모금 더 피러 나가셨다.
한 모금 더 피고 오신 쉐프가 타르트를 들고 오면서 하는 말씀이, 타르트는 파이를 실패해서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과 덩어리에 요거트 비스무리한 소스에 찍어먹는 그 달콤함이란! 달콤새콤함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동안에 커피가 그리 땡겼다.
옳게 된 친절함과 따스함에 감동하고 맛에 감동한 저녁식사. 우리가 식사를 마치자 현지인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의 배꼽시계는 9시부터인건가...
쉐프님 애연가인 건 알겠지만 그래도 담배 줄이고 건강하십쇼ㅠㅠ
2전채 2메인 요리에 와인 두 잔까지 해서 112.8유로
https://maps.app.goo.gl/cAgiuVy9noht2Q8Z8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첫 날 버스를 탈 때도 느꼈지만 모든 파리의 버스는 저상버스였다.
마침 우리가 내리기 전 전동휠체어를 탄 승객이 하차 버튼을 눌러달라고 해서 눌러드렸는데 버스가 멈추어 서서 저렇게 문이 내려오는 걸 볼 수 있다. 그가 떨어트린 물건을 주워드리고 해맑게 인사한다. Au revoir!
Au revoir, Paris
파리 3일차, 에펠탑의 야경을 볼 볼 수 있었다.
가까이 가기엔 너무 추웠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출발해야 했기에 멀리서 빛나는 영롱한 모습을 보며.
번역기를 돌려서 잘 쓴 건 지는 모르겠지만,
파리 사람들 올해 행사 잘 치르시고. 좋은 추억만 기억하고 갑니다.
다음 이야기 : Nice to meet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