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 에즈, 그리고 니스의 오후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행객들은 고개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호텔 조식에는 빠지지 않고 계란과 감자가 들어있다. 오늘 낮을 버틸 탄수화물은 이것.
기계로 라떼 한 잔을 마시다 문득 카운터 쪽 바를 바라보니 마침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당돌하게 찾아가서 에스프레소 한 잔 달라고 했다. 직원이 샷을 내려 나에게 가져다 준다.
지중해의 태양은 겨울에도 강렬하다. 눈부신 햇빛을 바라보며.
오늘은 니스 주변의 도시 에즈(Eze)와 모나코를 가려고 했다. 전날 구매한 교통카드에 금액을 충전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충전하는 데를 모르겠다. 호텔 카운터에 물어봤는데 정류장에 충전할 데가 있다던데 못 찾았고.
우리는 사람 좋아보이는 네 사람의 노년의 여인들에게 어설픈 영어로 물어보았는데, 아뿔사. 어르신들도 영어를 잘 못하네. 손짓발짓 동원해서 요로코롬 물어보자 'Tobac'이라 쓰여있는 곳에 가면 충전이 된다고 알려주신다.
감사합니다 어르신들 건강하십쇼!
저기 Tabac이라 쓰인 곳에 가면 종업원이 횟수만큼 금액을 받고 충전해 주었다. 한국으로 치면 교통카드 충전해 주는 편의점 같은 곳이었다.
모나코로 출발하는 TER 기차표를 끊고 후다닥 달려가서 기차에 탑승. 2층까지 앉을 수 있는 조금 비좁은 열차에 외국인들과 섞여 앉아 모나코로 떠난다.
모나코는 바다와 높다란 산맥이 인접한 작은 도시국가였다. 1년여 전 타이완의 지우펀에서 느꼈던, 절벽과 바다가 어우러진 도시였다. 타이완은 한국의 오래된 건물들이 즐비한 - 낡은 시골의 느낌이 강하다면, 모나코의 중심지는 오랜 중개무역의 사치인지, 아니면 조세회피와 카지노로 벌여들인 빵빵한 자금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든 게 번쩍이고 시가지 전체가 궁전만큼이나 화려했다. 상점엔 에르메스와 구찌 같은 수많은 명품관들이 들어서 있었고, 언덕길에는 수많은 외제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평범하다는 듯이 굴러다닌다.
모나코는 12세기 제노바 공화국의 땅이었다가 공화국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던 그리말디 가문 사람들이 무력으로, 이후 돈으로 지역을 사들여서 그리말디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중개무역으로 부를 쌓아왔건만 가문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영지에 가혹한 세금을 먹였고, 모나코의 90% 이상 차지하는 면적의 두 도시(망통, 로크브륀)가 독립(?)하면서 지금은 원래의 5%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도시국가로 남았다.
독립한 두 도시는 바로 니챠가 프랑스의 니스로 바뀌는, 토리노 조약 때 프랑스의 땅이 되었다고.
원래 땅의 5% 정도밖에 안 남은 해안 도시국가에 도로 하나로 유럽연합 전엔 프랑스 프랑을 쓰고, 프랑스랑 국경을 나눌 정도로 프랑스의 보호국 수준이지만 프랑스에선 딱히 모나코의 남은 땅을 흡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더라.
나는 금방 모나코에 질려버렸다. 물론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단조로웠다. 나의 여행관은 이곳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역사가 아우러진 문화와 행사, 투박함을 보고싶은가 보다. 우리가 굳이 비싼 돈 들여 요란한 스포츠카들이 굴러다니는 강남의 높은 빌딩과 명품관에 가서 한국의 전통적인 색채를 찾지 않듯이, 모나코인들의 전통적인 느낌을 보려면 이곳이 아닌 저 멀리 보이는 산골짜기 사람들을 겪었어야 했나 보다.
아니면 이런 모습이, 모나코의 오랜 중개 무역으로 쌓아 올린 사치스러운 본모습인 걸까?
카지노의 보안검색대를 통과했건만 우린 아무생각없이 호텔에 여권을 놓고오는 바람에 카지노에 입장할 수 없었다. 입장료는 인 당 20유로. 우린 전혀 미련이 없었지만 혹시나 일확천금의 기분을 누리고 싶다면 꼭 모나코 여행 때 여권을 챙기세요!
모나코도 엄연히 다른 나라였기에 니스의 교통카드가 먹히지 않아 우리는 현금으로 버스표를 사기로 했다. 우리는 ATM이던 현금을 마련하는 방법을 몰라 지나가던 사람을 하나 붙잡았다. 그는 어느 명품 매장의 직원으로 보였는데 빼어난 맵시의 정장을 입은 - 내가봐도 반할 정도로 - 잘 생긴 남자였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기차역으로 돌아가서 충전하거나 현금을 인출할 수 있다고 말하더니 길을 알려주다가 아예 우리와 스몰토킹을 하며 기차역까지 안내해 주었다. 모나코의 진부함에 실망했다가친절한 그의 모습에 다시금 기분이 좋아진다.
한 사람의 서비스가 이렇게 나라 전체 이미지를 훈훈하게 바꿔준다. 모나코좋아...
마땅한 환급 장소가 없었고 기념품 가게를 기웃이다 발견한 것은 스타벅스.
놀랍게도 매장 안에는 지폐교환기가 있었는데 100유로를 넣으니 순식간에 다른 지폐로 환급해주는 엄청난 기계였다. 덕분에 커피 한 잔씩 마시며 5유로를 만들어서 모나코를 탈출 할 수 있었다.
2024년 1월 기준 인당 2.5유로.
기차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에즈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교통경찰이 나타나 길을 통제한다.
1분 정도 지나자 높으신 분이 타고있는건지 차가 슝 지나갔다.
모나코의 높으신 분이면 가문의 대공이거나 총리가 아니었을까?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 나라의 수장이 탄 차가 슥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며.
모나코에서 에즈로 가는 길은 니스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내려 83번 버스로 환승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순진하게 구글지도를 믿었고 정류장에 내리자 하늘은 청명했고 따사로운 오후 2시의 햇빛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 2시엔 버스가 오지 않는다.
버스정류장에서 10여분 간 뇌정지가 온 채 현실부정을 하며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 올라왔건만. 정말로 버스는 올 생각이 없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버스같이 두 시간 가까이 안 올 줄 예상치 못했으니...
잠깐 멘붕했지만 침착하게 Bolt(볼트)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다.
목적지를 검색하고 배차를 받자 놀랍게도 2분도 되지 않아 지나가던 차량 한대가 바로 잡히는 것 아닌가?!
안토니오 아저씨가 운전하는 벤츠 차량이 부릉부릉 다가오더니 우리를 태워준다. 이용료는 10.7유로였는데 팁마냥 30센트 더해서 11유로를 드렸다.
하마트면 1시간 넘게 환승버스를 기다릴뻔, 2시간 간격의 버스라니, 여러분들은 꼭 여행계획 세우고 다니십시오.
에즈 성터는 산골짜기 중턱에 바다쪽으로 튀어나온 절벽 같은 땅에 올라선 옛 성터였다. 성의 끝자락은 바다가 보이는 경치가 좋아보이는 곳이었는데 아쉽게도 그곳은 사유지였다. 굳이 바다뷰를 위해 사유지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미로같은 고성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방들과 잠긴 문, 귀여운 기념품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이 모든 걸 건축한 당시의 솜씨와 기술력에 탄복했다.
에즈 성 내부에는 호텔도 있다. 체크인은 성 입구의 가건물에서 하고 이곳은 객실로 보인다.
에즈 성 입구에는 한 쌍의 산비둘기 부부가 번갈아가며 여행객들 주변에 맴돌았다. 관광객들이 해치지 않는 걸 아는 지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고 터줏대감 마냥 우릴 바라본다.
비둘기는 그리 무서워하면서도 산비둘기는 안무서워하는 아내가 정말 신기할 다름.
아내 왈, (그냥) 비둘기는 눈이 흉측하게 튀어나와서 무섭다고.
프랑스의 유료 화장실. 생각보다 깔끔했고 직원은 프랑스어 외에 통하지 않으며 절대 환전해주지 않는다.
꼭 1유로 동전은 몇 개 들고다니자. 안그래도 화장실 갈 잔돈 없어서 근처 편의점에 들르기로 했다.
에즈 성 앞의 Casino 편의점에 들러 물과 Lay 감자칩을 집었다. 프랑스의 레이칩은 맛이 다를까? 했는데 역시 짭조름하고 맛있다. 출출했던 우리는 금방 과자를 비우고 물로 목을 축이며 니스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렸다. 다행히 돌아가는 버스는 자주 오는 편이었고 외국인들 사이 보이는 동양인들은 모두 한국말을 썼다.
저 네모난 얼굴은 뭐지? 했는데 Tête Carrée 라고 하는, 영어로 하면 스퀘어 헤드(주사위형 머리) 국립 도서관이랜다. 예술의 나라 아니랄까봐 건물 하나 정말 특이하게 얹어놨다.
네모얼굴 건물이 보이는 정류장에서 내려 해안가로 쭉 뻗은, 부르가다 공원(Jardin de la Bourgada)부터 알베흐 공원(Jardin Albert 1er)까지 이어진 길쭉한 빠이용 산책길(promnard du Paillon)을 걸어온다.
저녁 시간대였는데 수많은 아이들이 공원에 비치된 그네 같은 놀이기구를 타고 공놀이를 하며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에도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뛰어노는 니스의 어린이들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공원길 한켠에 귤이 잔뜩 열린 귤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가톨릭 성당이 있었다. 무언가 영상 촬영 중이여서 들어가지는 못했다. 한겨울에 귤이 열린 나무라니 이곳은 제주..도?
알베흐 공원(Jardin Albert 1er)에 도착하자 향긋한 향기가 났는데 바로 가건물로 세워진 크레페 집이었다. 바로 옆에는 건설자재들이 쌓여있고 노동자들이 철봉을 들고 이리저리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크레페에 크림에 딸기와 초코시럽을 붙이고 붙이고.. 7.6유로. 혹여나 흘릴 까 나무칼로 썰어먹으며 굶주린 배에 달콤함을 보상으로 주었다.
이역만리 지중해 바다에 손을 담가본다. 시원한 바닷물이 자갈에 부숴진 거품이 손끝을 휘몰아감는다.
한껏 노을진 바다의 감성을 담고 숙소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었다.
"봉수아~" 리넨을 갈아주는 호텔 환경사가 주머니에서 웨스트엔드 호텔의 로고가 박힌 마들렌을 쥐어준다. 복도 너머 조심스레 들어보니 손님이 있는 방마다 불러보며 마들렌을 나눠주는 것 같았다.
겨울의 밤은 길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도시는 주광색 빛으로 물든다.
오늘의 저녁을 찾아 이리저리 골목을 다녔는데 어느 가게엔 파티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축배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삶이 부러웠다.
원래는 다른 가게를 가려고 했는데 비수기다보니 열지 않은 가게들도 수두룩...
플랜B 따위 잘 안세우는 우리는 이리저리 먹을만한 데를 찾아 갈팡질팡하다가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호탕한 식당 주인 할아버지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세즈 모리(Chez Mori's, 모리의 집?)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사실 구글 평점이 4점 미만이라 반신반의했는데 종업원들은 살갑고 호객행위하는 할아버지의 가벼운 장난기도 마냥 재밌었다. 파리에서 머리가 깨져서 그런지 맛과 가격도 합리적이고 양파스프는 여행 내내 맛있었다. 이 집 해산물 뻴라는 어제 먹은 식당보다는 풍미가 조금 덜했지만,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다. 스테이크도 너무 질기지 않고.
배고픈 여행가들은 어딜 가도 맛있게 먹는걸까?...
양파스프에 쇠고기 스테이크와 뻴라까지 도합 78유로.
https://maps.app.goo.gl/NiWjmBER24uRMwqo8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