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요리사는 흔하다. 요즘은 요리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많아 남자 요리사를 보는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내가 2~30대 때만 해도 어른들은 남자가 주방에 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들이 그걸 더 막았다. 간혹 어머니나 장모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내가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남자는 주방에 서는 거 아닐세.”라고 정색하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주방일, 특히 요리는 나와 무관한 일로 생각하며 살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주말이 ‘라면 데이’인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라면을 좋아해서 너무 자주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주말에 한 끼 정도 허용했던 것이다. 이때 라면을 끓이는 일은 종종 내가 맡았다. 평소 주방에 서는 일이 별로 없던 나로서는 가족들에게 생색내기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내가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가 라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주방에 설 기회는 우연히 다가왔다. 두 아이가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내가 일로 인해 잠시 집을 비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들 밥을 챙기는 일이 내 몫이었다.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 같은 걸로 대충 때울 수도 있었지만, 왠지 직접 요리를 하고 싶었다. 블로그에 올라 있는 요리 레시피를 보면서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찌개 종류와 카레라이스, 야채 볶음밥 같은 일품요리를 만들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이후 내가 주방에 서는 일이 가족 내에서도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회사 퇴직 후에 내 생활의 변화 중 하나는 주방에서 음식을 요리하는 일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미 경험이 있는 데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전보다 조금 난도가 높은 음식에도 도전했다. 잡채, 생선조림, 수제비, 돼지고기 수육 같은 요리들을 레시피를 참고해 만들었다. 나에게 계속 요리를 하게 하려는 전략이었을까? 아내는 새로운 요리가 등장할 때마다 호평했다. 가끔씩 집에 오는 아이들이 “아빠 김치찌개 먹고 싶다.”라고 은근히 주문을 넣기도 하고, 명절에 잡채를 만드는 일은 어느새 내 몫이 되었다. 가족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즐거움이었고, 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해 보는 것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요리를 하려면 그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사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장을 보러 가는 일도 당연히 내가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 주 동안 먹을 음식들을 대강 정하고, 그에 필요한 재료와 양념 종류를 사러 나가는 것이다. 요리를 좀 하다 보니 재료를 보는 눈도 생겨서 어떤 고기가 맛이 있고, 어떤 야채가 싱싱한지 고를 수 있게 됐다. 재료를 사서 한두 끼 사용하고 냉장고에서 버려지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양을 조절하여 장을 보는 법도 알게 됐다.
퇴직하면 소위 ‘삼식이’가 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야 하는 아내들에게서 불만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애들 키우고 나서 이제 좀 편해지려나 했더니 남편이 집에 눌러앉아 있어서 삼시세끼를 챙겨야 하는 일이 즐거울 리 없다. 독서 모임을 같이 하는 여성들이 가끔 이런 남편 흉을 보는 걸 들을 때, ‘나는 삼식이가 아니야.’라며 혼자 미소를 짓는다. 나는 직장을 다닐 때도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것이 편치 않은 성격이라서 뭐든 내가 할 역할을 찾고자 했다. 특히 퇴직 후에는 나 대신 아내가 일을 하는 상황이어서 주방일이나 빨래 같은 집안일을 내가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비슷한 때 회사를 그만둔 동료들을 가끔 만나면 자주 하는 얘기들이 있다. 집에서 무얼 하고 지내는지, 집안일은 어떤 걸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등등이다. 어떤 동료는 학생인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을 한다고 했다. 다른 동료는 집에서 몇 가지 요리를 시도해 봤는데, 아내와 딸의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서 앞으로 요리는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고 얘기해서 한바탕 웃었다.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른 것처럼, 퇴직 후의 삶도 제각각 다르다.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일도, 가정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일도 그렇다. 퇴직 후의 느슨해지기 쉬운 삶에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는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방법으로 나는 요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리가 척척 잘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분명히 요리 레시피를 따라 만들었는데도 맛이 이상했다. 간이 안 맞을 때도 있고, 재료가 덜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은 요리 하나 만드는 데도 주방이 엉망진창이 될 정도였다. 조금씩 경험이 쌓이면서 하나씩 좋아졌다. 음식의 맛은 가족들의 취향에 접근해 갔고, 요리하는 중간중간에 설거지를 병행하면서도 시간 안에 요리를 끝내는 요령도 생겼다.
나의 퇴직 후 불안하고 막막한 삶에서 요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자못 컸다. 열심히 재료를 다듬고, 끓이고, 볶는 과정이 진행되면서 마음속의 파문이 가라앉기도 하고, 작은 성취가 한껏 자신감을 올려 주기도 했다. 그래서 퇴직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틈나는 대로 주방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