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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Aug 12. 2023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단평.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면서도, 환상의 세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 영화가 공식적으로 일체의 줄거리, 정보, 스틸컷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해외 개봉시에도 비슷할 것으로 추측되며, 그러기에 이 글에 적힌 내용은 모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는 40년 넘게 일본 애니메이션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풀 프레임의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특유의 환상적인 연출로 많은 관객들을 사로 잡았죠. 물론 영광만 있던 건 아니죠. 미야자키도 고령의 나이를 맞이한 것은 물론, 타카하타 이사오의 타계 이후 스튜디오는 새로우면서도 명성을 이을 후계 연출가를.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있다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이름이 지닌 무게는 너무 무겁죠.


이미 <추억의 마니>를 끝으로 지브리의 상시 제작팀은 해체되었고, 이후 지브리 최초로 비일본 감독을 영입해 사실상 ‘투자’의 개념으로 제작한 <붉은 거북>이나 미야자키 고로의 신작이자 지브리 최초의 풀 3D 애니메이션인 <아야와 마녀>가 있었지만 이전의 지브리 작품들 처럼 반향을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많은 이들은 족히 2010년대 후반부터 슬슬 정보가 나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임을 선언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미 미야자키의 은퇴 선언이 한 두번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처음 이야기가 나올 때는 좀 시큰둥한 의견도 있었습니다. 당장에 전작 <바람이 분다>도 처음 나올 때는 은퇴작이 될 거라는 언급이 있었죠. <모노노케 히메> 때부터 계속 은퇴를 이야기하고, 다시 번복하며 돌아오는 패턴이 반복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 신작이 개봉한 지금 미야자키의 나이는 타카하타가 타계했던 나이와 똑같은 만 82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품은 좀 더 직접적으로 감독의 자전적인 부분을 아낌없이 언급하고, 더욱 과감한 방식으로 드러내며 영화가 지닌 무게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작품은 전작 <바람이 분다>의 시대와 붙어 있는, 일본 제국 시기 막판의 도쿄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 ‘마히토’(산토키 소마)의 집안은 꽤나 유복해 보여요. 집안도 꽤나 대저택이고, 아버지 ‘쇼이치’(기무라 타쿠야)는일본 여기저기에 공장을 지니고 아마 사이판 같은 일본 제국의 당시 식민 영토에도 공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만 병원에서 일하는 어머니 ‘히사코’가 도쿄 대공습으로 세상을 떠나고, 집안은 공습을 피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옮기게 됩니다.


아무래도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이었다보니, 당분간 새로운 집이 될 이곳도 주변이 도쿄처럼 번화하지는 않아도 큼지막한 대저택입니다. 아버지는 이 곳에서도 (아무래도 비행기 콕핏을 생산하는 것 같은…) 공장을 확장할 계획 따위를 세우고 있죠. 하지만 마히토는 이미 모든게 혼란스럽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아른 거리는데, 아버지가 충분한 작별의 시간을 주지 않고- 하필 어머니와 똑 닮은 친동생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와 재혼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가 문제들을 돈으로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모습도 모두 지긋합니다. 그 논리에 충실한 아버지의 공장 노동자나, 어머니의 고향 저택 사람들도 모두 그러기에 더욱 마음을 둘 곳이 없어요.


영화는 2시간이 약간 넘는 러닝타임에서 약 절반인 50분 가까이를 이런 ‘현실 묘사’에 초점을 맞춥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는 <바람이 분다> 이후로 가장 가까이 일본의 근현대 모습에 다가가고 있죠. 미야자키 이외의 지브리 작품으로 넓히면 <반딧불의 묘>나 <추억이 방울방울> 같은 작품도 있지만, <바람이 분다> 이전 그래도 근현대에 가까이 접근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초반 10여분을 제외하면 바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갔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꽤나 긴 호흡으로 ‘또 다른 세계’와 이어지기 전의 현실을 접근합니다.


이전에도 미야자키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등등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모습을 관조해왔지만 ‘현실 그 자체’를 작중으로 잘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팜플렛에 실린 ‘공식 영화 줄거리 및 해설’에서 이 작품을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소년 시절에 겹쳐 쌓은 자전적 판타지‘라 지칭하는 것처럼, 영화는 실제 감독이 어린 시절 느끼고 다시 어른이 되어 반추하는 현실에 강하게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 현실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버블 시대를 언급하면서도 하나의 추억이자 코미디로서, 직접적으로 일본 제국 시기를 그린 <바람이 분다>에서도  일본 제국이 지닌 모순과 한계를 말하면서도 ‘낭만’을 담았지만, 이 작품은 이미 시작되는 순간부터 도쿄 대공습의 한복판이죠. 대공습이 지난 이후로도, 겉보기에는 풍요로움과 ‘문명 개화’를 구가해도 안에서는 아직 자라날 시기가 한참 남은 소년닌 ‘마히토’도 느낄 정도로 모순과 문제 투성이입니다.


영화의 ‘환상’은 이 모순을 마주치며 구성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어딘가 이상한 왜가리(스다 마사키)를 우연히 느끼는 것부터지만,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마히토는 이 왜가리가 깃든 거처이자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외큰할아버지가 지은 저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택에 발을 내딛은 순간,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기 시작하고 다시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기묘한 세계로 빠져들게 되죠. 마히토는 아직 자신이 지닌 불안감과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이를 풀기 위해 환상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 환상을 보여주는 이미지와 사운드에서는 이래저래 공을 깊게 들였음이 느껴집니다. 이미 스튜디오 지브리는 여러 작품을 통해 고밀도의 프레임으로 사물과 신체의 유려한 움직임을 그리는 것으로 정평을 받았지만, 이 작품의 표현은 섬세함과 역동성을 더욱 강화시켜 냈습니다. 마냥 부드럽지 않고 때로는 잔혹과 폭력을 더욱 구체화된 형태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 ‘환상의 세계’가 비현실적이면서도 결코 실제 일어나는 것같은 감각을 더욱 불러일으켜 냅니다. 그러한 광경이 구현되는 가운데 음향은 입체적인 효과에 심혈을 기울여, 더욱 화면 속 모습이 ‘또 다른 현실‘처럼 느껴지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이 ‘실존할 것 같은 이세계’는 정말 현실에서의 도피와 또 다른 실존을 위한 공간임이 드러나며 이 표현이 무엇을 위해 드러났는지로 이어집니다. 이는 어찌보면 환상을 통해 현실의 이면과 또 다른 가능성을 말했던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 그 자체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는 물론, 환상적 표현은 현실을 현실 그 자체로 매여 드러내는 대신 창작자의 자유로운 묘사를 위한 표현법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유로울 수록 현실과는 거리를 둘 수 밖에는 없습니다. 쉽게 고를 수 없는 선택지 앞에 놓인 마히토의 고민은, 어떤 의미에선 미야자키 감독 본인이나 더 나아가서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을 업으로 택한 많은 이들, 또는 관객 모두에게 던지는 번민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고민으로 나아가기 위해 작품은 작중 내내 쉽지 않은 선택지를 택했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결코 직접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던 피나 폭력을 과감히 드러내는 것은 물론,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게 도움을 주는 장치도 마련하지 않습니다. 꽤나 염세적이고,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의 모순이 무척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환상을 말할 때는 그에 맞춰 섬세히 환상을 드러내고, 결국 최종적인 선택지를 고를 때에도 지브리 특유의 따스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연출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묘한 시도의 연속은 어쩌면 감독이 정말로, 번복 없는 은퇴를 결심했기에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제작위원회 형태의 초기상을 만든 지브리이었는데) 제작위원회 구성 없이 지브리 자체 예산으로만 이 작품을 만들었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이 작품을 만들겠다는 결심은, 쉽고 간단하게 말하기 어려운 작품의 구성으로도 이어지는 느낌입니다. 현실의 감각으로서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전하기 위해 환상을 택하지만, 환상에만 몰두하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환상 자체에서 도피하는 것도 정답은 될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보는 이들이 놓인 현실과 다시 이들이 만들고 바라보는 ‘과정이자 결과’로서의 환상의 얽히고 섥힌 관계 그 자체를 미야자키는 <그대들은 어떨게 살 것인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작품 그 자체로 보아도 조금은 어둡지만, 밝음을 완전히 놓지 않으며 현실을 위해 모험을 이어나가는 아동용 환상 문학을 생각나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현실을 더 지긋이 바라보기 위한 환상과 장르의 필요성을, 그러면서도 환상과 장르를 무시하지 않고 그 세계를 함께 존중하며 쉽지 않은 공존을 모색하는 작품이 나온 것입니다. 자전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그러면서도 생각치도 못한 자유로운 환상을 같이 덧붙여내는 혼종적인 애니메이션이 그렇게 ‘은퇴작’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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