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상민 Jun 17. 2024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단평.

인지를 회피하는 인간들을, 인지하는 공간.

일찌감치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로 일세를 풍미한 조나단 글레이저는 뮤직비디오 시절 지녔던 명성에 비하면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물론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나와,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탄생>(2004) 같은 작품도 있었죠. 하지만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와 비교하면 뭔가 심심한 점이 있었습니다. <탄생> 이후 10년 만에 만든 장편 <언더 더 스킨> 전까지 말입니다.


<언더 더 스킨>은 이전 조나단 글레이저가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였던 감각적인 묘사를 상당히 과감하게 시도한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과감한 것은 이미지뿐만이 아니었죠. 지구인에 기생하는 외계인이 다른 지구인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감정을 느끼고 인지하는지를 제법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가 고정된 시점에서 공간의 감각을 변형하며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줬던 것처럼 말입니다.


뮤직비디오는 물론 <언더 더 스킨>에서도 실제 현실과는 살짝 거리를 둔 시공간을 무대로 삼았던 조나단 글레이저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무척이나 시공간이 분명한 장소로 무대를 옮겼습니다. 시간은 한창 나치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을 펼치고 있던 시기며, 공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에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의 저택입니다. 이전까지 조나단 글레이저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선 가장 시공간적 배경이 확실한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그가 연출한 작품 중에서 <언더 더 스킨> 이상으로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미 여러 매체나 홍보자료, 작품을 보신 분들이 언급했듯 이 작품은 실제 카메라를 움직이며 찍었을 장면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어딘가에서 등장인물들을 계속 감시하거나 관조하는 것처럼 실제 인물과 거리를 둔 감각으로 카메라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감독이 인터뷰에서도 촬영장 구석구석에 수백 개의 카메라를 숨겨놓는 식으로 촬영을 했다고 말했죠.) 이러한 촬영의 감각은 비인간적 행위가 자행되는 중에서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평온함을 유지하고,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회스 가족의 상황을 드러내는 의도로 읽힙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어하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촬영의 감각은 회스 가족의 저택 뿐만이 아니라 그 외부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심지어는 시간대 자체가 갑작스럽게 미래이자 현재로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계속 되기 때문입니다. 밤을 표현함에 있어서 일반적인 야간 장면을 촬영하는 것처럼 최소한으로라도 조명을 배치하거나 촬영의 감도를 높이는 대신, 열화상 카메라로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어요.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쉽게 시야를 확인하기 어렵고, 이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는 있지만 소격효과가 발생하는 카메라 이상으로 더욱 실제 현실 같으면서도 어딘가 빗겨나간다는 감각을 받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영화는 통상적인 영화처럼 특정한 공간 속에 위치한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촬영한다기보다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그 공간에 스며들거나 침입하는 이들의 모습을 부가적으로 기록한다는 느낌이 강해집니다. 심지어는 시공간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정작 인간들이 이 말을 무시하는 듯한 장면도 연이어 펼쳐집니다. 당장 회스 저택 바로 건너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명과 총성이 영화 내내 울려 펴지고, 수용소에서 흘러나왔을 것이 확실할 회색 잿더미가 강을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도 이들은 이 소리와 이미지와 물질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나마 외부에서 온 이방인 같은 존재만이 이 이상함을 느끼지만, 그 역시 제대로 이 메시지를 말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감각으로 스크린은 물론 극중에서도 사라집니다. 그 회피는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체득된 일상적 감각일 수도 있지만, 극이 어떤 시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를 몰라도 게속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를 잠식하는 의도적인 불협화음에 신경을 쓰이는 이들에게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계속 이어지는 일상과 업무의 연속에서 이물의 감각을 느끼게 되고 맙니다.


마치 <언더 더 스킨>에서 지구인의 외피를 쓴 외계인이 인간을 접하며 처음 접하는 생경한 감각에서 혼란을 겪는 상황을 그렸듯,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시공간이 어떻게 자신들 내부에 있는 이들 인간의 존재를 느끼면서 혼란을 겪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매우 직접적으로 극중의 시점과 현재의 시점을 몽타주로 이어내는 부분에서는 어떻게든 감독이 이 뒤집힌 감각을 알아채길 바라는 듯한 느낌마저도 받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구조적으로 기획된 학살이 자행되는 공간이 어느 순간 이 학살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 될지라도, 관료적 체계에서 비롯되어 기계처럼 반복되는 무기질의 노동은 바뀌지 않습니다. 20세기 전반 이 공간을 죽음의 장으로 기획했던 이든, 그 이후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추모의 장으로 변환한 이들도 이는 크게 신경 쓸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이 공간이, 심지어는 극중의 카메라가 비추지 않을 때에도 계속 남아있을 이 공간의 존재만이 여전히 반복되는 기묘한 역설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들의 행위를 공간의 시점으로 바라보게끔 하며 극중에 전개되는 상황의 비릿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한편, 더 나아가 인식의 주체를 과감하게 인간 밖으로 빼내기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관객들에게 와닿게 설명을 해야한다는 압박 때문인지, 극중에 삽입된 장면들에 함유된 감각이 과잉되었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그 장면들을 묘사하지는 않는다지만, 대다수의 관객들이 어떻게든 인지할 수 있도록 연출을 하니 어떤 점에서는 ‘절제된 과잉’ 같은 역설적인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 과잉조차도 인간 이외의 주시자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기술과 진보를 과신하다 결국 최악의 결말로 치달았던 제2차 세계대전 그 자체를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홀로코스트’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한 결과라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글레이저는 <언더 더 스킨>에서 내놓았던 이야기를 더욱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언더 더 스킨>보다도 더욱 고정적인 시공간을 못 박으면서도 오히려 그 고정된 시간대를 뒤트는 느낌으로 이어나갑니다. 인지란 그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인지, 직접적으로 형상화된 눈이나 귀, 입이 없더라도 어떻게 사물과 공간이 인간을 비롯해 거쳐가고 머무는 이들을 포착-관찰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마치 신유물론이 떠오르는 느낌으로 인지와 소통의 감각을 되묻는 작품은, 그러한 시각 아래에서 홀로코스트를 바라보고 다시 홀로코스트가 ‘명백한 전쟁 범죄’이자 ‘학살’로 공식적인 정의가 내려진 이후에도 계속 반복되는 끔찌한 문제를 어떻게 상기할 것인지를 되묻습니다. 인간이 각자의 한계와 이해관계에서 그들의 인지는 선택적이 되어도, 이들을 감싸는 시간대와 공간마저 이들을 선택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아무런 기록자가 없다고 해도, 공간에 깃든 맥락과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이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시 말할 것이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