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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Jun 25. 2024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 단평.

강한 팬서비스 성격의 작품, 그래도 유려한 연출로 뜨겁게 스포츠를 그린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가 농구를 다룬 만화 중에서는 가장 세상에 널리 인기를 받은 작품이라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하이큐!!>는 배구를 다룬 만화 중에서 가장 정점에 섰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두 작품의 스타일은 천양지차죠. <슬램덩크>이 농구에는 초짜인 주인공의 성장, 농구에 천재적인 또 다른 주인공 사이의 라이벌 관계 속에서 뜨거운 근성을 강조하면서 극을 이끌어 나갔다면, <하이큐!!>는 스포츠 만화의 클리셰를 계속 따라가며 뜨거울 때는 무섭게 불타올라도 학원 스포츠라는 세계 밖의 흐름을 함께 조망하면서 완급을 적절히 조절해 나갔습니다. 주인공이 속한 학교 외에도 다른 학교의 묘사도 충실히 다루면서 ‘고교 배구(스포츠)’라는 무대에 무수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음을 꽤나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일본 만화가 흔히 그렇듯 만화가 기세를 타니 당연히 애니메이션도 나왔습니다. 2012년부터 원작이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했는데, TV 애니메이션은 2014년에 처음 나왔어요. 이후로 2020년까지 총 4개 시즌에 걸쳐 TV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의 형식으로 나왔지만 일본에서는 단행본 부록 형식으로 OAD도 몇 편 나왔죠. 새롭게 그린 컷을 추가한 극장개봉용 편집판도 4편이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TV 애니메이션의 4번째 시즌이 나온지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원작의 클라이맥스이자 결말부를 다루는 <하이큐!! FINAL> 극장판 기획이 나오게 된 겁니다. TV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되는 것은 최초이고, 총 두 작품에 걸쳐서 내놓는다고 했었죠. <극장판 하이큐!! 쓰레기장의 결전>은 그 첫 번째 작품입니다. 작품 연출은 TV 애니메이션 시즌 1~3의 연출을 맡았던 미츠나가 스스무가 맡았어요.



<쓰레기장의 결전>이 다루는 파트는 주인공들이 속한 미야기현의 카라스노 고교와 도쿄도에 속한 네코마 고교가 춘계 고교 전국 배구 대회의 3회전에서 맞붙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요. 제목이 ‘쓰레기장의 결전’인 이유는 ‘카라스노’(烏野)의 카라스(烏)가 까마귀를 뜻하고, ‘네코마’(音駒)에서 ‘네코’를 고양이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배구 라이벌인 두 학교의 대결이 까마귀와 고양이가 쓰레기장에서 서로 다투는 것처럼 작중에서 비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큐!!>는 연재 초기부터 빠르게 팬들을 끌어모았던 작품인 만큼 매 대결 시퀀스마다 많은 화제를 모았지만, <쓰레기장의 결전>에서 다루는 카라스노-네코마의 대결은 이래저래 의도적으로 많은 대조를 지으며 주목을 모았던 파트기도 합니다. 미야기현과 도쿄도라는 시골 학교와 도시 학교의 대결, 스피드 배구를 연상하는 젊은 감독이 이끄는 학교와 오랜만에 고교 배구로 돌아온 노감독의 올드스쿨 스타일의 배구, 그리고 무엇보다 카라스노 고교의 ‘히나타 쇼요’와 네코마 고교의 ‘코즈메 켄마’라는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고, 연재 초창기부터 교류가 있었던 캐릭터의 라이벌십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나타는 스포츠 만화에서 흔히 볼법한 근성 있는 열혈 캐릭터지만, 켄마는 겉으로 보기엔 근성과 열혈과는 엄청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고등학교 이후에는 딱히 배구를 할 생각도 없는 건 물론, 배구를 하면서도 게임 생각을 지울 수가 없고 밤샘 게임을 밥먹듯이 할 정도로 게임에 푹 빠져 있어요. 그러다 보니 운동부이지만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켄마는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고, 돌아가는 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분석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불타오르면 히나타에 못지 않을 만큼 적지 않은 집념과 ‘모두가 함께하는’ 배구에 대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두 학교의 대결은 끊이지 않는 공격과 이를 전략적으로 풀어 헤치려는 두뇌의 싸움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켄마의 캐릭터성은 스포츠 만화에서 완전히 없던 것은 아닙니다. 웬만한 스포츠 만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분석가 캐릭터’에 좀 더 가깝죠. 테니스 만화 <베이비 스텝>나 야구 만화 <원 아웃> 같이 이런 류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는 작품도 있긴 했지만 완전한 주류라고 하기엔 어려웠고, 두 만화 모두 좀 더 변칙적인 형태로 스포츠를 전개하고 있었죠. <하이큐!!>는 이러한 분류의 캐릭터를 계속 조연의 위치에 놓아두는 대신 주인공의 또 다른 라이벌이자 주인공이 있는 학교를 가로막는 상대 학교의 주축으로 설정하면서 이 캐릭터의 이야기를 많이 할애하고자 합니다. 어떤 점에서 켄마의 캐릭터는 현실에서 자주 볼법한 학교 스포츠부 학생의 모습 같기도 해요. 딱히 체대에 진학하거나 프로 선수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어쩌다 보니, 친구를 따라가다보니 스포츠를 하는 그런 학생 말입니다. 장르 특유의 과장을 섞긴 했어도, 상대적으로 스포츠 부활동에 의욕이 낮은 사람이라도 결국 어느 순간에는 스포츠에 쾌감을 느끼며 불타오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장의 결전>은 이 시퀀스를 TV 애니메이션의 감각을 이으면서도, 극장판에 맞게 좀 더 힘을 줘서 표현하고 있어요. 물론 이런 류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이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에겐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원작을 봐야먄 이 캐릭터들이 왜 여기서 이렇게 반응하고 있고, 이 캐릭터는 누구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한 불친절함 속에서 이 작품의 주된 결을 이루는 카라스노-네코마의 대결은 상당히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2D와 3D의 합성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은 물론, 두 팀 사이의 배구공이 서브, 리시브, 토스, 그리고 스파이크로 정신 없이 움직이고 있는 액션씬도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 1인칭으로 전개되는 클라이맥스의 장면은 상당히 과감한 연출이자, 뜨거운 경기의 한복판에 관객을 VR처럼 체험할 수 있게 이끕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원작 팬을 집중적으로 노린 팬서비스 같은 작품이 원작 팬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물론, 흥행의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기록을 거둔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일본에서는 총 흥행수익 100억엔을 돌파하고, 한국에서도 곧 70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죠. 물론 이는 <쓰레기장의 결전>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원래도 중요했지만 미디어 프랜차이즈 전략에서 애니메이션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고, TV 애니메이션으로 알린 인지도에 수익을 만들기 위해 극장판에 힘을 기울이는 전략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원작을 안 본 사람들은 깔끔히 쳐내는 스타일의 움직임이 썩 좋다고는 생각되지 않아도, 어찌되었든 퀄리티는 준수하니 팬들은 물론 박진감 넘치는 묘사에 원작을 보지 않는 사람들도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근래의 애니메이션 비즈니스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같은 작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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