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상민 Aug 21. 2024

<빅토리> 단평 : 여성이 주인공인 ‘빌리 엘리어트‘

<응답하라> 시리즈일 것 같았던 외관, 속은 진한 청소년과 노동의 시선

<빅토리>는 얼핏 보면 tvN <응답하라> 시리즈에 매우 큰 영향을 받은 작품처럼 보입니다. 주연도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 역을 맡았던 아이돌 ‘걸스데이’의 멤버 혜리이고, 시대적 배경도 1999년으로 확고히 못을 박고 1990년대 인기곡들을 쥬크박스 뮤지컬처럼 틀면서 슬며시 <응답하라 1997>의 기운을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몇몇 곡은 그보다 좀 더 이전 노래라서 <응답하라 1994>와도 사용된 악곡이 겹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초반부까지는 분명 그런 느낌이 드는게 사실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서서히 자신이 <응답하라> 시리즈와 얼핏 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사실은 결코 같지 않은 성격의 작품임을 드러냅니다. 1999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의 공간 배경은 경상남도 거제시이거든요. ‘거제’는 그저 서울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거나 사투리를 쓰기 위한 설정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거제는 굵직한 조선소들이 모인 공업도시이고, 영화는 이 지점을 분명하게 가져갑니다. 혜리가 맡은 주인공 ‘필선’을 비롯해 몇몇 등장인물들의 아버지는 이 조선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상우조선해양’이라는 가상의 기업이 등장하는데, 한눈에 봐도 ‘삼성중공업’과 이제는 한화오션이 된 ‘대우조선해양’에서 따왔을 이름이죠. 회사 위치는 다르지만, ‘상우’라는 네이밍은 왠지 모르게 HD현대 산하의 조선사 ‘삼호’를 떠오르게 하고요.)



다시 말하면 필선을 비롯해 함께 치어리더부 ‘밀레니엄 걸스’로 활동하는 여고생들은 이 공업도시의 노동자 가족의 자녀기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취미에 굶주려 있고, 누군가는 이 거제라는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필선과 찰떡같이 붙어 다니는 ‘미나(박세완)은 듀스나 디바를 좋아하며 힙합 댄스에 심취해 있죠. 필선은 언젠가는 서울로 올라가서 댄서가 되고 싶어하고요. 애시당초 힙합 댄스를 좋아하면서 치어리더부를 만든 것도, 나이를 속이고 나이트에서 춤을 추다 그만 어쩌다보니 패싸움에 휘말려 댄스부 연습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정 때문에 서울에서 전학 온 ’세현‘(조아람)도 이 동네가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고요. 아무리 조선소가 지천에 널려 있어 다른 지방도시보다는 상황이 나아 보여도, 이 도시는 어딘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즐길 것이 참으로 부족하고 어른들도 이 ’최신 유행‘을 영 이해하지 못하는 아쉬움 투성이인 동네인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에 지방 공업도시가 지닌 하나의 속성을 더 부각하기 시작합니다. 때가 1999년이라는 점에서 눈치를 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1997년 IMF 경제위기의 여파가 본격적으로 밀려오기 시작한 때이죠. 그 직전 1996년 노동법 날치기로 인해서 하청노동자가 마구 양산되기 시작한 시기기도 하고요. 놀랍게도 <빅토리>는 한국 상업영화 중에서는 매우 상세하게 원래도 열악했던 노동의 질이 더욱 불안정하기 시작한 상황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분명 같은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떤 노동자들은 휴일에도 밤낮없이 일을 해야 하고, 심지어는 산재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분명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고 같이 자라며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이인데, 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로 갈라진 상황은 이들의 관계에도 심각한 골을 만들고 맙니다. <빅토리>는 이러한 지점을 쉽게 가리거나 지우는 대신, 상당히 직접적으로 상황과 대사와 감정으로서 드러내고 다시 이를 주인공들의 ’치어리더 댄스‘와 합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연습실을 다시 얻으려는 면피용으로, 다시 지루한 현실을 잊으려고 했던 하나의 돌파구였던 ’댄스‘는 점차 플롯에서 복합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합니다. 춤은 때로는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학교나 가족 구성원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기는 마중물이 되고, 춤으로 맺어진 인연은 현실의 벽에 치여도 제대로 감정을 토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서로 돕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순간에서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자본의 하수가 된 이들에게 비웃음을 날릴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빅토리>는 단순한 취미를 통해 뭉친 학교 배경의 드라마를 넘어, ’춤‘으로 어떻게 다양한 사람들이 뭉칠 수 있는지를 그립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저 지루하고 따분하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공업도시의 작은 삶이 자본의 이해관계를 이유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를 넘어설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고등학생들이 주연인 하이틴 드라마‘의 문법을 하고 있기에 지나치게 무겁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다른 한국 상업 영화에서 흔히 보았을 법한 전개로 그려지는 부분도 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99년이라는 시대와 거제도의 조선업이라는 도시의 구조를 영화의 소재와 인상적으로 결합하면서, 자칫하면 뻔할 수 있었던 이야기에 또 다른 깊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자 고등학생‘이라는 소재를 그저 가볍게 낭비하는 대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업고등학교의 여자 학생‘들이 심리를 포착하는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홍보가 작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특색을 너무 납작하게 만든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좀 더 청소년의 힙합/치어리딩 댄스와 노동과 함께 가는 공업도시의 삶을 결합시켜낸 작품의 톤을 드러낼 방법은 없었던 것일까요. (연출자가 저지른 문제로 인해 이젠 참 말하기 쉽지 않아진…) 어찌보면 이 영화가 영감을 받았을, 같은 거제 배경의 다큐멘터리이자 다시 드라마로도 각색된 <땐뽀걸즈>를 생각하면, 또는 이 영화와 비슷한 선상에 서있는 <빌리 엘리어트>나 <스윙걸즈> 같은 작품을 떠올려보면 이 작품이 지닌 묘한 특색을 살릴 방법은 없었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래저래 <빅토리>는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여기며 지나치기엔 참으로 아까운 작품임은 확실합니다. 한국의 상업 영화에서 계속 시도했던 리얼리즘적인 문법과 장르적인 문법을 합쳐내는 작업이, 정작 그간의 한국 상업 영화에서 쉽게 다뤄지지 않았던 청소년과 노동에 대한 시선과 녹여내는 작품이 대체 얼마나 있었는지요.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를 강조하는 대신, 춤으로 일상의 모순을 날리고 통쾌함을 주는 작품의 클라이막스처럼 풋풋한 밝음을 놓치지 않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코로나-19 이후 거센 정체에 놓여 있는 한국 상업 영화가 어려운 와중에서도 그간 쌓은 레거시를 바탕으로 돌파구를 뚫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시도인 것입니다.


덤. 1990년대를 배경으로 댄스가 메인이 되는 작품답게 댄스 장르의 노래가 많이 쓰이지만, 의외로 록도 중요한 장면에 쓰이는 편입니다. 응원가의 대명사 중 하나인 김원준의 <쇼>는 물론이고, 신성우와 015B의 장호일, N.EX.T의 멤버였던 이동규가 만든 프로젝트 밴드 ’지니‘의 <뭐야 이건>까지 쓰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니‘의 노래가 중요하게 삽입된 거의 첫 번째 한국 영상물 아닌지.

매거진의 이전글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단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