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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Jul 13. 2024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단평.

캐릭터/원작 기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라는 굴레에서 시도되는 폭발적인 감각

출시 당시에 비하면 조금은 열기가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일본 Cygames(사이게임즈, 광고 마케팅 대기업 CyberAgent의 게임 자회사)에서 서비스하는 <우마무스메 PRETTY DERBY>(이하 <우마무스메>)는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모바일 게임입니다. 2016년에 처음 공개되어, 심지어는 게임 본편보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판이 먼저 나올 정도로 무수한 딜레이를 거친 끝에 코로나-19가 아직 한창이던 2021년 일본에서 처음 출시되었죠. 첫 공개 이후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게임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출시 바로 직후부터 화제가 되었고, 이제 일본 기준으로 출시 3년 차를 맞이하는 2024년 현재도 <우마무스메>는 스테디셀러 모바일 게임으로서 입지를 확고하게 박은 상황입니다.


<우마무스메>의 흥행에는 무수한 요인들이 있겠지만, ‘캐릭터’와 ‘캐릭터가 놓인 맥락’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감각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마무스메>를 출시 전 한창 홍보를 하던 때 이런 작품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을 했을까요. 십중팔구는 다양한 취향을 노린 무수한 캐릭터로 승부하는, 그 캐릭터를 뽑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결제하는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흔해 빠진 모바일 게임 중 하나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긴 출시 연기를 거쳐 발매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저 눈요기용으로, 흔해 빠진 작품 사이에서 어떻게든 독특함을 드러내고자 경주마를 여성으로 의인화한 줄 알았는데, 인간으로 그려진 경주마들의 레이스를 상당히 치열하게 묘사했던 것입니다.


캐릭터로 승부하는 게임이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시도하듯 <우마무스메> 역시도 각 경주마 캐릭터가 지닌 독특한 속성, 소위 ‘케미’로 칭해질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성, 그리고 미형으로 그려진 캐릭터에 매력을 가지도록 (그렇게 해당 캐릭터를 게임 내에서 활용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어넣어, 이용자로 하여금 기꺼이 유료 확률 뽑기를 시도할 수 있게) 구성된 면은 있습니다. 하지만 <우마무스메>는 경마를 단순히 캐릭터나 배경, 설정의 모티브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마에서 펼쳐지는 말들의 치열한 승부 그 자체에 강하게 초점을 맞추면서 각 에피소드의 드라마를 만들고, 캐릭터들의 감정과 심리 표현을 형성했습니다.


게다가 <우마무스메>가 제작된 일본은 경마가 발달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매년 뜨거운 승부가 언론에 회자된지 오래며, 일찌감치 경마를 소재로 한 캐릭터 상품이 등장할 정도로 경마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죠. 역사적인 경마 레이스를 인간형 캐릭터의 이야기로 치환하여 뜨거우며, 희로애락으로 가득한 드라마로 만들었으니 더더욱 <우마무스메>에 등장하는 각 캐릭터들의 서사에 집중하기도 쉽습니다. 비단 일본 경마의 역사나 명승부를 모르더라도, 경주 하나하나를 앞둔 캐릭터들의 모습에 공감하기도 좋은 서사 배치기도 했습니다. 각 캐릭터의 서사가 단순히 도구적인 역할을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스포츠 승부나 스포츠 소재 만화/애니메이션 등을 보는 감각으로 열광하기 좋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여기에 <우마무스메 신데렐라 그레이>(한국 미발매) 같은 스핀오프 만화 작품이 더욱 <우마무스메>가 지닌 스포츠물의 속성을 강화하며, <우마무스메>는 정말 독특한 미디어 프랜차이즈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우마무스메>의 첫 극장판 애니메이션 <우마무스메 PRETTY DERBY 새로운 시대의 문>(이하 <새로운 시대의 문>)은 이러한 ‘스포츠 드라마’에 더욱 강하게 힘을 불어넣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감독부터 이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으로 기용했죠. <플립 플래퍼즈>나 <약속의 네버랜드> 원화로 주목을 받고, 이후 웹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눈 석이는 보라>에서 연출자로 데뷔했던 야마모토 켄이 감독을 맡았습니다. <포켓몬스터 눈 석이는 보라>는 원작이 되는 게임 시리즈가 있다는 것, 힘을 줘야 할 지점에서 순간적으로 작화와 원화에 포인트를 넣고, 역동적인 카메라 워킹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번 <새로운 시대의 문>과 겹치는 점이 많은 전작이었습니다. 작품이 기반으로 삼는 실제 레이스도, ‘2001년’이라는 21세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해에 벌어진 승부와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면서 작중의 캐릭터나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고조를 끓기 쉬운 소재로 잡았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새로운 시대의 문>이 극의 전반을 구성하고 이끌어 나가는 방식입니다. 인기 작품을 원작으로 한, 심지어는 이미 TV 애니메이션이 나온 상태인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이러한 작품 상당수는 ‘이미 원작이나 TV 애니메이션을 본 상태’를 전제하고 전개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캐릭터에 대한 빌드업을 완전히 생략하는 것은 물론, 왜 작중에서 이런 전개가 벌어지는지, 왜 이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는 이러한지는 이 작품을 단독적으로 봐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새로운 시대의 문>은 게임이나 TV 애니메이션 등에서 다뤄지지 않은 내용을 다루는 오리지널 스토리이긴 하지만, 2023년에는 이 작품의 프리퀄 성격을 지닌 웹 애니메이션이 나온 상태였죠. 여타의 원작이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그랬듯, 철저히 원작을 아는 팬을 중심에 맞춰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문>은 그와 반대의 길을 갑니다. 도리어 원작을 정말 존재 정도만 알거나,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 또는 이러한 ‘원작이 있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관행적인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봐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작품을 독립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요. 오프닝 테마가 나오는 시퀀스의 연출, 결말부에서 네 명의 주인공이 펼치는 ‘위닝 라이브’, 스탭롤이 올라갈 때의 <우마뾰이 전설> 같이 원작을 알거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관행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좀 곤란할 수 있는 부분도 여전히 존재하긴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어떤 의미에선 이 작품이 <우마무스메> 프랜차이즈에 속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속함을 입증하는 흔적처럼 남아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부분들을 제외하면 작품은 정석적인 스포츠 드라마이자 성장담의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이에게 매료되어 자신도 스포츠의 길을 걷고, 새롭게 등장하는 라이벌들과 만나며 이들과 펼치는 치열한 승부에 고양감을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이 항상 탄탄대로일 수 없듯, 주인공 역시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막을 계속 가로 막는 강력한 라이벌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가운데 주인공은 결국 원하는 성과를 얻어내지만, 오히려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했다는 쾌감보다는 라이벌이 사라진 자리를 어부지리로 채웠다는 자격지심과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초조함만이 강해집니다. 주인공은 그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인공의 주변 사람들은 주인공이 계속 침잠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스토리라인으로만 보면 정말 정석적이지만, 특별히 주목할 만한 포인트는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각 캐릭터의 속성을 잘 알거나, 캐릭터의 원본이 된 실제 경주마의 이야기를 잘 안다면 작품의 저류에 깔린 심리를 더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던 스포츠 소재 이야기의 단순 변주에 머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 빈 부분을 메꾸는 것이 바로 작품의 연출입니다.


원작도 경주마를 의인화한 캐릭터들이 달리는 경주에 방점을 찍고 있는 만큼, <새로운 시대의 문> 역시도 등장인물들의 달리기 승부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전부터 역동적인 묘사에 능했던 야마모토 켄의 연출은 이 하나하나의 달리기 승부에 바짝 힘을 불어넣는 것으로 오소독스한 스타일의 이야기에 몰입감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설정상 일반인들의 몇 배에 달하는 빠른 속도로 달리는 ‘우마무스메’ 캐릭터의 속도를 드러내기 위해 카메라는 마치 레이싱 경주를 그리듯 스피디하게 움직이고, 이에 맞춰 캐릭터들도 역동적으로 그려집니다. 달리면서 자연스럽게 팔다리를 교차하며 움직임도 유려하게 묘사하는 건 물론, 레이스가 점차 진행되면서 캐릭터들이 스퍼트를 내고 클라이맥스에 가까워질수록 캐릭터를 구성하는 선은 더욱 요동칩니다. 원화 사이를 잇는 동화도 더욱 애니메이션의 과장을 극대화히고 있어요. 캐릭터들의 표정도 평상시의 미형이 아닌,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땀이 멈추지 않는 감정의 고조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장면이 2D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작화와 3D 애니메이션 특유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카메라 위킹과 유려하게 결합되어 제시됩니다. 매 레이스 순간마다 레이스에 임하는 캐릭터의 감정에 몰입하기도 쉽고, 박진감 넘치는 경주의 감각에 빠지기도 용이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을 전부 강한 장면의 연속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은 강약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캐릭터들의 움직임에 당위성을 만드는 한편, 그 당위성에 합치할 수 있는 연출적인 감각을 드러내고 있어요. 레이스와 레이스 사이의 캐릭터들 사이의 발화를 다룸에 있어, 각각의 캐릭터가 자신이나 상대방, 또는 조만간 찾아올 레이스에 대해서 어떠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짚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원근감이나 애니메이션 속 공간에 놓여 있는 캐릭터의 위치가 시퀀스마다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다수의 애니메이션에는 쉽게 쓰지 않을 구도나 캐릭터에 대한 드로잉 표현을 과감하게 시도하기까지 합니다. 스토리만으로는 포인트가 두드러지지 않아도,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방법에 맞는 연출을 아낌없이 쏟아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을 멈추지 않는 연출의 시도가 <새로운 시대의 문>를 다른 ‘원작이 존재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전혀 다른 감각을 선사합니다. 원작 팬들에 초점을 두고 최대한 배려하는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작품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형성에서 탈피하는 선택 역시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업적인 목표가 강한 애니메이션은 더욱 만나기 쉽지 않은 감각이기도 하고요. 이래저래 게임 <우마무스메>가 정형적인 캐릭터 게임에 속하면서도 다시 다른 면모를 시도했던 것처럼, 애니메이션 <새로운 시대의 문> 역시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완벽하게 캐릭터 애니메이션의 굴레나, 원작 기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는 못해도 어떻게 해야 최대한 다양한 감각을 이끌어 내고, 다양한 층위의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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