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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달 Sep 11. 2016

그저 도피하고 싶었다

어떤 계획도 없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은 늘 존재했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뿌연 안개처럼 가려져 있었다.


우리의 시골행은 '귀어'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귀어, 귀촌에 대한 철저한 준비나 계획도 없었다. 

전라북도 부안에는 젓갈로 유명한 곰소 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구름 호수(운호) 마을. 바로 그곳에 시어머님이 사시던 집이 한 채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마음으로 이 집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 집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1년 정도 텅 비어있던 터라 건드리면 폭삭 주저앉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까지 이뤄온 일들을 다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오는 것은 사실 겁이 났다. 그렇지만... 어차피 복불복이라 생각했다. 남편과 나는 "도시에서 못 버티나 시골에서 새로 시작하나 똑같다"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찾을 때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쩌면 그래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해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나는 쓰러져가는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물론 시골로 내려올 것을 염두에 두고. 혹시 시골 생활이 힘들게 되더라도 몸과 마음이라도 쉬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자연도 보고 집도 내 손으로 고치면서 남편과 시간을 가져 보겠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서울로 돌아온 남편과 나는 고민 끝에 시골행을 결정했다. 1톤짜리 트럭으로 상황이 될 때마다 서울에서 부안으로 짐을 옮겼다. 버릴 것을 과감히 버리고... 그때가 2010년 2월이니 바람은 칼바람에 도로는 살엄음판이었고 나는 왠지 모를 패배감, 외로움,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도 우릴 반겨주지 않을뿐더러 "결국 이렇게 포기하게 되는 걸까"라는 씁쓸함 때문에 남편 몰래 눈물도 흘렸다. 남편이 보면 더 맘 아파할까 봐, 혹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올까 봐. 어차피 다시 돌아가 봐야 똑같은 생활이 될 것임을 알기에 마음 굳게 먹고 1년 정도만 버텨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 해 겨울은 눈도 많이 오고 정말 추웠다. 

"대체  어떡하려고 무작정 떠나 온 거지?" 

"뭘 하며 먹고살지?"

"뭐 하면서 하루를 보내지?"

남편한테 들킬세라 속으로 끙끙거리는 사이 그 황량한 시골집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부안에 도착해 이삿짐을 풀었다. 주위에 모든 상황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이 드신 노모가 집을 가꾸시기나 했나, 마당은 풀이 내 종아리를 훌쩍 넘었고 어머니가 아까워서 다 못쓰셨던 장작은 삮은채로 마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나를 더 암담하게 만들었던 것 중에 하나는 마당에 깔려있던 이부자리였다. 비가 오면 발이 빠지니까 어머니가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 깔아놓았던 것이었다. 허구한 날 빌딩과 아스팔트에 익숙했던 나는 그것조차 보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겨울인데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것도 큰 문제였다. 끼니는 컵라면으로 때우기 일수였다. 궁금해서 찾아온 마을 어른들은 슬쩍슬쩍 다녀가셨고, 우리가 안돼 보였는지 김장김치 한통을 갖다 주신 어르신도 있었다. 이런 건 정말이지 어색했다. 도시에선 나만 열심히 해서 잘살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오래된 장판을 닦고, 또 닦고... 겹겹이 이불을 깔고 손전등으로 밤을 보냈던 것이 이 집에서의 첫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튿날부터 우린 새벽부터 일어나 집 가꾸기에 돌입했다. 돈을 안 들이면서 집을 고치려니 자재도 자재지만 공구들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도 없으니 한두 가지도 아닌 공구를 빌릴 수도 없어 난감했다. 우선 우리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나갔다. 새벽부터 밤까지 언제 잠들었는지, 언제 깼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들이 쌓여가며 우리 집은 형태를 나타나기 시작했고 은근히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가져와서 원두막도 만들었다. 도시 사람들의 로망 '원두막'. 순전히 우리 둘이서 만들어 냈다. 원두막을 짓고 나니 못 만들고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푸세식 화장실이 있던 곳을 메워서 화단을 만들기도 하고 마당에 자갈을 깔아 나름 분위기도 바꾸고... 남들이 생각하는 전원생활의 필수요건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갔다.  대학생이었던 딸은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페인트칠이며 소소한 일거리를 찾아 도와주었고, 이제야 우리 엄마 같다며 좋아했다. 


돈이 필요할 때면 가지고 있던 보석을 팔고 덜 필요한 보험을 해약하고... 서울에서 하던 일들을 동생에게 넘겨주며 받기도 했던 이자로 근근이 생활을 해 나갔다. 2~3개월이 정신없이 지나자 우리의 공간은 그럴듯해졌다. 솔직히 이뻤다. 뿌듯하기도 하고. 힘든 시간이었음에도 행복했고 많이 웃었고 정신적인 위로도 된 시간이었다. 우리에겐 부지런함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한다. 안정됨과 행복감이 크게 느껴질수록 이제부터 뭘 해서 이 행복을 놓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기 시작했다. 


집을 정리하며 한숨을 돌리니 이제 먹고 살 일을 걱정해야 했다. 물론 쉬려고 내려왔으니 쉬면 좋으련만 우린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 했다. 원래는 부안 시내에서 금방이나 음식점으로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막상 내려와 보니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다가 우린 자그마한 배 한 척을 빌렸다. 집에서 차를 타고 조금 가면 왕포라는 항구가 있는데, 왕포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업을 해 먹고살았다. 우리는 아주버님에게 소라 잡는 어구를 얻어 그걸 사용해보기로 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소라를 잡기 위한 미끼로 홍합을 사 와서 무작정 아주버님께 갔다. 첨부터 끝까지 한 번만 보여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우리는 어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며칠 후 소라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 소라잡기 첫날 소감은 "신기했다". 진짜 소라가 걸려 올라왔다! 초보한테 걸려준 소라들에게 미안하면서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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