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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달 Sep 15. 2016

어부의 아내가 되다

항구의 새벽 바람은 너무 추웠다

항구를 지날 때면 한쪽에 정박해놓은 배들을 보면서 "왜 안쓰고 묶어두기만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여러가지 정황을 듣고나니 배 한 척 쯤은 빌릴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집 근처 왕포 항구에 가작 했다. 우리가 늘 다니는 바다 앞이 마을이 왕포마을이다. 이름도 어쩜 이렇게 바다냄새가 짙은지...


남편은 중학교까지 여기서 다녔기 때문에 이리저리 맞춰보면 선·후배가 아닌 사람이 없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는 얼굴하나 없었다. 그래도 동네 분들과 마주치면 인사도 잘하고 늘 열심이고 묵묵히 다니는 남편은 이미 점수를 따놓았기 때문에 배를 빌리는 데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아주 작고 귀엽기까지 한 (나룻배같은) 배를 빌려 여기저기 손을 봤다. 


그때부터 우린 소라잡이 어부가 되었다. 우리는 소라가 좋아하는 홍합을 여수까지 가서 사오고,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소라 어구를 바다에 무사히 넣을 수 있었다. 설레임과 동시에 내가 진짜 어부가 될수있을까 라는 의구심 마저 들었다. 2~3일 정도 소라가 먹이를 먹는 시간을 주는데 갖은 생각이 다 들었다.

"소라가 얼마나 잡혀있을까?" 

"어떤 모습으로 소라가 올라 올까?"

새벽부터 단단히 준비하고 드디어 소라를 데리러 바다로 나갔다.


항구의 새벽바람은 너무 추웠다.
가로등만 서 있고 아무도 없는 바다는 무척 적막했다. 


휑~한 바다에 우리 둘만 나가려니 두려움이 앞섰다. 4월 중순이었지만 바다라 그런지(아님 마음이 추웠는지 모르겠지만) 난 여태껏 그해 왕포항의 초봄이 젤로 추웠다. 나를 태우고 가는 남편의 얼굴을 훔쳐보니 무척이나 긴장돼 있음을 그냥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다는  아주 무섭도록 까만색깔을 내뿜었다. 꼭 나를 시험하듯이... 

소라 미끼를 넣어둔 곳에 도착해 깃대를 잡고 끌어올리니 거짓말 처럼 어구에 소라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난 탄성을 질러댔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쉴새 없이 나왔다.ㅎㅎㅎ


"우리한테도 걸리는 구나 소라'님'께서..."

우리 그물에 걸려준 소라한테도 감사하고 동시에 어쩌다 초보어부한테 걸렸냐고 꾸짖어 주기도 했다.


그 날, 우리의 첫 수입은 9만원 이었다. 솔직히 액수로만 보면 우습겠지만 그날의 9만원은 우리에겐 희망이라는 값어치로 환산 되어 9백만원, 아니 9천만원 이상의 힘을 가졌다. 도와주신 동네분들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어서 남겨두었던 소라를 삶아서 작은 파티를 벌였다. 삶이 녹녹치 않다고들 하지만 진짜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쉽게도 잡혔던 소라는 바람이 분 다음날엔 서로들 엉켜서 소라도 다 떨어져 나가버리고 어구도 없어지는게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한달 보름동안의 소라잡이가 끝나갈 무렵 항구에 꽃게잡이 배는 만선으로 북적거렸고 우린 슬슬 어장을 넓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소라보다는 꽃게벌이가 훨씬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꾸준히 해 나가는 어장이 있어야 진짜 어업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쓰고 있는 배는 너무 협소해서 꽃게를 잡아도 따기도 불편하고 그물 추리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현금 흐름이 좋질않아서 주머니엔 목돈이 없었는데,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말만 믿고 배를 보고 다녔다. 지금 같으면 정부지원금을 활용해 볼 생각도 했겠지만 그땐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날 마치 어장을 해야하는 이유라도 생긴 것처럼 뜻밖의 곳에서 돈이 들왔다. 어쩌면 간절함이 컸기 때문에 그 상황이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그 해 우리 친정부모님은 수시로 우리집에 들락거리셨다. 기특하기도 했겠지만 걱정이 많으셨을 게다. 심지어 친정엄마는 남편한테 모진 소리도 했다. 

"배 서방~~우리 딸 뱃년 만들었으니 좋나~? 알아서 잘 하게..."
가슴에 콕 박히는 소리를 해댔다.
하지만 우리 둘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로 합의를 해 나갔다.


인생을 살면서 성공 여건중 하나에  서로 배우자를 잘 만나야 된다는 글도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별 문제없이 시골로 내려와 어장을 하게 된것도 어쩌면 서로에게 적당한 배우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부부는 마지막까지 진솔한 친구이자 동반자, 게다가 의리로 묶여 있다면 더 없이 든든한 빽이 아닐까. 물론 요즘은 그 깊이를 갖기도 전에 헤어져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하지만 말이다.


어느날 부터인가 왕포항을 지날때 마다 내 눈에 들어온 제법 크고 멋진 배가 있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배를 볼때마다 남편을 불러 세워놓고 "이거 우리 배 되게 해달라고 빌어" 웃으면서 흘리던 말도... 그 멋진 배는 선장실도 따로있어서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우리를 보호해주는 공간이 확보되는 좋은 배였다. 우리는 그 길로 선주를 찾아가 알아보고 계약을 진행시켰고, 곧 그 크고 멋진 배는 우리둘의 것이 되었다.

"자~~~ 이제 꽃게잡이를 시작해얄텐데. 소라와 마찬가지로 아는게 있어야지..."

성격도 괄괄하고 목소리도 큰 나는 의외로 낯을 많이 가린다. 바다를 나갈때면 두꺼운 옷에 햇빛 가리개 모자에 눈이 안좋아 선글라스까지... 늘 인사를 해대지만 사복을 입고 어쩌다 항구에 가면 한분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런 와중에 왠지 맘이 끌려 말 몇마디 나누기 시작한게 인연이 되어 돈독히 지내는 형님네 부부를 찾아가 꽃게잡이 조언을 구했다. 고마운 분들이 참 많지만 이 분들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참 성실하시고 진솔 하시고. 역시 현재는 어촌계장님으로 당선되어 멋지게 해내시고 계시다. 꽃게 그물사는것을 선두로 하여 닻 준비 등 속전속결로 준비를 마치고 그물넣는 걸 보여달라고 떼를 써서 우리배에 모시고 나가서 배웠다. 소라를 잡을때하고는 많은게 달랐다. 먼 바다로 나가야 했고 더 일찍 준비해야 했기 떄문에 기상시간도 빨라졌다. 꽃게는 온도가 높으면 죽어 버리기 때문에 밤작업을 해야만 했다. 먼 바다로 나간다는 것은 아주 긴 시간 혼자만의 항해를 의미한다는걸 그때 알았다. 그것은 곧 고독이며 두려움을 말하는 항해였던 것이다. 이런 시간들이 쌓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자신감에도 생겼다. 마치 오랫동안 어장을 했던 것처럼...


새내기들 한테 당부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누군가는 옆에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우리도 많은 도움을 받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에 그들에게 먼저 신뢰를 줘야만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꽃게철이 끝나가면서 왕포항 사람들은 또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쭈꾸미 잡이였다. 부랴부랴 우리도 쭈꾸미 잡이 정보를 캐고 다녔다. 쭈꾸미는 소라 껍질을 사용했다. 쭈꾸미 들이 소라를 넣어두면 집으로 삼아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아파트에 입주 하듯이...


오랫동안 어장을 한 주민들은 별 준비 없이도 순탄하게 진행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걸 준비해야 하는 우리는 숨이 목에 찰 정도 였다.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익숙해지고 돈 좀 만질라 치면 또 새로운 어장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주머니는 늘 빈털털이가 되어 있었다. 슬슬 지쳐 갈무렵 쭈꾸미 잡이는 꽃게 보다 훨씬 수월했고 멀리 나가지 않아도 돼서 우선 안심이 되었다. 수입도 꽤 짭짤했다. 일단 집에 들어오면 쉴 시간이 생기는게 제일 좋았다. 꽃게 잡이는 들어와서 그물을 추려야 하는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봄 부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새 해볼 건 다 본 한 해가 끝나갔다. 운 좋게도 그 해 12월에는 숭어잡이를 나갔다 만선이 되어 부안 시내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었다. 그날 우린 배에 한 가득, 1톤 넘는 숭어로 대박을 쳤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주 어업이 활발했던 언젠가 이후로 만선은 처음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아쉽다. 그런 상황을 한껏 누렸어야 하는데 그땐 자주 그런일이 있는줄 알았다. 첫날부터 그런일이 생기니 늘 있는건 줄 알았다. 그러니 좋은 일이 생기면 한껏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자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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