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동시대에 같이 살며 지휘자이자 작곡가로서 활동한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명은 빈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였던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이고 다른 한 명은 그보다 4살 아래로 베를린 궁정악단의 지휘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이다. 두 작곡가는 당대 유명한 지휘자로서 서로의 작품을 지휘하며 친분을 쌓았지만,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지휘자로서 명성을 날렸지만, 생전에 작곡가로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말러와는 달리 슈트라우스는 지휘자로 활동했던 당시에도 작곡한 많은 음악이 항상 이슈를 만들었고 인기를 끌었다. 음악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고군분투했던 말러와 달리 슈트라우스는 ‘아침에 책상에 앉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구원이란 건 필요 없다.’라고 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Johan Strauss, 1825-1899)와는 전혀 다른 음악적 색깔을 가진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세기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곡가이다.
당대 뮌헨 궁정악단의 수석 호른 주자였던 아버지와 양조업자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음악교육을 받았고 아버지로 인해 오케스트라 리허설 현장을 수없이 경험했다. 그는 모차르트, 멘델스존과 더불어 천재적 재능을 보인 작곡가로 언급되는데 여섯 살 때 첫 곡을 작곡하고 10대에 이미 많은 곡을 작곡했다. 보수적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는 슈만, 멘델스존 스타일의 음악을 구현했지만, 열아홉 살 때 지휘자 한스 폰 뷜로를 통해 마이닝겐 궁정악단의 지휘자를 맡으며 음악 세계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곳에서 바그너와 리스트의 신독일음악의 매력을 접하고는 이후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쓰게 된다. 브람스 교향곡에 경외심을 가졌던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 계보를 잇는 건 브람스가 아닌 리스트라며 브람스와 브루크너의 음악이 불안하고 미완성적이라고 폄하한다. 한 사람의 생각이 바뀌자 방향과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슈트라우스 음악 인생은 전반부는 교향시, 그리고 후반부는 오페라로 점철된다. 리스트가 창시한 교향시(Symphonic poem)는 19세기 중후반에 유행했던 표제음악의 대표적인 장르로 단악장의 자유로운 형식으로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제목과 이야기를 관현악법으로 그려낸다. 오늘날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그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96>를 포함하여 스물네 살에 초연한 첫 교향시 <돈 후안, 1888>부터 마지막 교향시 <영웅의 세계, 1898>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10개의 교향시를 남긴다.
그의 묘사적인 교향시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면, 40세 이후부터 전념했던 두 오페라는 파격적이고 기괴한 아방가르드 스타일이었다. 영화보다도 더 파격적인 오페라 <살로메, 1891>는 성경 속 한 구절을 각색하여 세례요한을 사랑하다 죽인 ‘살로메’라는 캐릭터를 만든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탄생한다. 격한 에로티시즘과 광기 서린 표현 때문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27년간 연주 금지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리스 고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각색해 만든 <엘렉트라, 1909> 또한 복수심에 휩싸여 복수극을 펼치는 공주 엘렉트라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초연 당시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오페라라는 평을 받았다. 그의 오페라 15편이 모두 광기 서린 것만은 아니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 1911>는 아름다운 빈 왈츠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오페라로 드레스덴에서 초연한 이후로 1년에 50회나 공연됐다. 당시 이 오페라를 위해 드레스덴으로 가는 특별열차까지 생겼었다.
그의 교향시와 오페라는 세상에 강렬한 이슈와 인상을 남겼지만, 사실 그의 음악 인생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던 장르는 예술가곡이었다. 여섯 살에 처음 작곡한 <성탄의 노래> 이후로 200곡 정도의 가곡을 남겼고 말년에 마지막으로 남긴 두 작품도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접시꽃>이라는 가곡이었다. 그의 대부분의 가곡은 슈만이 클라라를 생각하며 썼듯 사랑하는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연인 소프라노 파울리네(Pauline de Ahna, 1863-1950)를 위해 대부분의 가곡을 소프라노 성부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고 많은 가곡 연주에 직접 반주하곤 했다. 스물세 살 때부터 7년간의 연애 끝에 1894년에 결혼했는데 <4개의 노래 작품 27>을 결혼식 날 그녀에게 헌정했다. 그의 가곡은 오페라에서 보여주는 파격적인 불협화음과 흔들리는 조성의 느낌보다는 긴 프레이징의 선율적인 아름다움과 풍부한 화성적 색채로 후기 낭만주의의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슈트라우스는 오페라와 가곡 두 분야에서 모두 인정받고 성공한 흔치 않은 작곡가였다. 그는 사람들의 기호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었다. 절충과 시장을 지향하며 사람들의 비평에 그리 흔들리지도 않았다. <돈 후앙>을 올린 후 많은 찬사와 더불어 많은 혹평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고 파격적인 오페라 <살로메>로 질타를 받았을 때는 ‘물의를 일으킨 덕분에 가르미슈에 집을 짓지 않았냐’고 태연히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성격으로 열정 없는 무미건조한 작곡가, 철저한 계산으로 만든 음악, 깊이가 없는 작곡가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타고난 유전적 재능과 여러 악단의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보다 더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향연은 없다고 할 정도의 음향적 색채를 만들어냈다. 바람소리를 내는 윈드머신, 천둥소리를 내는 선더시트, 카우벨, 바셋호른(저음 클라리넷), 첼레스타 등 그의 음악에 등장하는 다양한 악기의 조합은 음색의 비밀을 터득하기 위한 끊임없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걱정 없는 성격과 환경으로 삶의 고뇌가 별로 없었던 슈트라우스에게도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 유태인이었던 말러가 나치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던 것에 반해 슈트라우스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 각지는 물론 러시아, 미국에까지 연주 여행이 활발했고 1차 대전 동안에도 명성과 부를 쌓으며 활동했다. 나치 정권의 독일 제국음악원의 수장까지 맡았다. 한쪽에서는 나치 정권에 침묵하고 히틀러 제국의 악장까지 맡고 있는 그를 두고 비난의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유태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 함께 작업한 이력과 유태인 며느리로 인해 그의 가정에도 나치 정권의 탄압이 들어오게 된다. 결국 그는 제국음악원 수장을 그만두고 은둔하다가 스위스로 망명한다.
슈트라우스는 나치 정권을 지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나치가 금지했던 말러, 드뷔시의 곡들을 고집 있게 연주 무대에 세우는 등 그에게는 음악이 먼저였다. 그러나 1945년 독일이 패배하고 나서 나치 정권 협력 혐의로 그는 재판에 넘겨진다. 결국 무죄로 석방되긴 했지만, ‘감옥에 갔던 작곡가’, ‘나치 정권에서 영향력 있었던 작곡가’라는 오명을 입게 된다.
일연의 일들을 겪으며 슈트라우스는 비로소 삶에 대해 깊이 자각했고, 이후의 작품에서 단순하고 낭만적인 스타일과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음악을 작곡한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의 파괴된 문화를 비통하게 생각하며 작곡한 <메타모르포젠>, 그가 머물고 있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 진주한 미군 장병의 요청으로 작곡한 <오보에 협주곡>, 그리고 아내를 생각하며 삶과 인생에 대해 성찰하며 쓴 <네 개의 마지막 노래>까지 수준 높은 아름다운 곡을 말년에 남겼다. 사교적이며 자신감 넘치고 고뇌와 고독의 시간이 거의 없었던 슈트라우스에게 긴 인생의 시간은 삶과 음악을 돌아볼 시간을 선물해준 것이다. 죽기 1년 전, ‘나는 1급 작곡가가 아니요. 하지만 나는 1급의 2류 작곡가쯤 될 테죠.’라고 말한 슈트라우스. 그의 말년의 작품들을 듣다 보면 극대화된 음향을 연구하듯 투쟁과 광기의 끝을 탐구하다가 결국은 겸손한 태도로 아름다움과 영원을 바라보게 되는 그의 음악 세계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사유해보게 된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슬픔도 기쁨도 함께 지나쳐 왔다네
이제는 높고 조용한 곳에서
우리의 방랑을 끝내고 쉰다네
하늘이 점점 어둑해지고
주위의 계곡은 낮게 가라앉는데
두 마리 종달새가 꿈을 꾸듯이
안갯속으로 날아오르네
-슈트라우스의 가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Vier Letzte Lieder)중 저녁노을(Im Abendrot)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