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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경 Apr 26. 2024

“우리 호텔 가서 좀 쉬었다 갈까?”

[나의 안식월 이야기] 쉬었다 가도 되는 사이

“저기까지 갔다가 되돌아오자.”   

  

되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양말을 벗고 신고 온 운동화를 손에 들었다. 미끈하고 단단한, 때로는 미끄덩한 서해 갯벌이 내 발을 온전히 감쌌다. 방심하면 미끌. 휘청거릴 때마다 언니 팔을 잡았다. 한때 씨름왕이었던 언니의 하체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나도 요즘 피티 받는데 부끄럽다. 갯벌에 농락당하는 부실한 내 하체가 짠할 지경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떼듯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여차해서 넘어지면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여긴 모래사장이 아니고 갯벌이니까. 언니가 말했다.     


“안 해 보던 거 하니 참 좋다. 사람들이 왜 나이 드는 줄 알아? 늘 하던 것만 하려고 해서 그래. 이렇게 새로운 거 해 보니까 참 좋다. 우리 이렇게 살자. 재미지고 좋아. 최자매. 여기 데려와줘서 고마워. 너무 좋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도 깔깔 웃으며 걷는 순간의 행복. 이걸 어떻게 말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많은 말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다. 좋다. 좋았다. 재밌었다. 그거 다 아닌가. 오래 기억할 수 없으니 기록할 수밖에. 마음속에 꽉 들어찬 기쁨을 부족한 글로 표현하자니 그것도 아쉽긴 마찬가지. 그래도 쓰고 기억하련다. 이 행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발 씻는 곳이 있어서 쪼금 더 행복했다. 발톱 사이사이로 갯벌이 까맣게 끼어들어 가서 걱정스러웠는데... 깨끗해진 발을 보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단순하다. 행복도 별 게 아니고. 마침 가방에 발 닦을 손수건도 있었다. 내가 발 닦은 손수건으로 언니도 발을 닦았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맨발로 은 뒤 운동화 신어본 사람은 알 거다. 발이, 몸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깃털처럼 가벼운 몸으로 다시 솔밭길을 걸었다. 이제 막 잎을 틔운 은행나무가 눈부시다. 냄새가 고약한 은행나무의 여린 잎이 이렇게 예뻤던가. 짙은 초록의 소나무 사이로 은은하게 빛나는 은행나무의 존재를 홀리듯 본다. 이 길이 끝나고 있다. 아쉽다.


 


“최자매 가을에 또 와. 맥문동 필 때 다시 걷게. 좋은 추억 만들어줘서 고마워.”

“언니 덕분에 나도 너무 좋다. 같이 걸어줘서 고마워.”    


정확히 이 말을 몇 년 전 내소사를 걸으면서도 했던 것 같은데... “이 길을 같이 걸어줘서 고맙다”는 말,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다.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다.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 내가 말했다.     


“우리 호텔 가서 좀 쉬었다 갈까?”

“으응? 그럴까? 하하하.”


호텔 가서 쉬자는 말에 언니 눈이 커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가 또 말했다.


“손만 잡고 있을게.”


시답지 않은 어른의 농담을 타박하지 않고 적당히, 아니 박장대소하며 웃어주는 언니가 좋다. 정색하지 않고 유머를 유머로 받아주는 언니가 좋다. 어릴 때 아주 잠깐 되길 바랐던 개그맨이 되어 꿈을 이룬 기분이다. 웃기는 재주 하나 없는 내 이야기를 듣고 웃어주는 사람에게 내 마음은 도리 없이 훅 기운다.

     

호텔을 잡고 여행하니 이런 게 좋더라. 일찍 체크인해서 좀 쉬면서 오후 일정을 생각하는 것. 오전부터 바삐 움직인 여행자에게는 꿀 같은 시간이다. 아리사 언니와의 여행에서 얻은 팁이다. 충주 갔을 때도, 제천에 갔을 때도 그렇게 여행했다.



탑클라우드 호텔 801호. 옆방이 없는 코너룸. 마음에 들었다. 나름 시티뷰가 예뻤다. 조명도 이쁘고, 창밖을 보며 서 있는 언니 모습도 맘에 들었다.      


“자고 갈까?”

“그럼 나야 좋지.”     


손도 안 잡았는데 자고 가겠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월요일 아침 중3 아들을 등교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사람. 내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다. 언니랑 시시하고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호텔 옆 번영주택 사서 공동 작업실로 쓰자는 말 같은. 원고료 모아 작업실 사려면 얼마나 오래 모아야 하는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처럼 우리는 저녁 식사 메뉴도 정하지 않고 미적거렸다. 결심했다. 요즘 입맛 없다는 언니를 그냥 집으로 보내기로. 점심을 맛있게 먹어서 나도 밥 생각이 없었다.

      

“언니 저녁을 먹기는 좀 힘들 것 같아. 대신 내일 점심을 잘 먹자. 내가 예약할게. 봐둔 데가 있어. 근데 예약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     


결국 손도 못 잡은 우린 밖으로 나가 근처 하나로마트에서 모싯잎송편을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 언니를 배웅하며 내일 아침에 와서 또 쉬었다 가라고 했더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 언니, 진짜 어쩔. 이제 진짜 안녕. 만난 지 6시간 만에 이별. 울지도 않았는데 언니 눈이 부었다. 피곤해서다. 

      

“최자매, 읽을 책 있어?”

“아니.”

“이거 읽어. 그리고 가져 가.”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다.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 여름의 시작에 여름의 끝을 읽는 밤. 드라마 두 편을 연달아 보고 커튼을 쳤다.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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