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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위로가 되거든요"

[내 인생의 심사평]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삶의 태도에 대하여

by 은경

“노래는 사람의 모든 감정을 다루잖아요. 되게 힘들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위로가 되는 거거든요.”


지난 10월 21일 방송된 <싱어게인 4> 참가자 대기실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남자. 예선에서 제작진들에게 “음악을 만드는 의미를 좀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원인을 잘 모르겠다. (이곳 오디션에) 막상 와 보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참가하게 되었다”라고 고백한 남자. 그가 1라운드 조별생존전에서 자신을 ‘나는 일종의 가수다’라고 소개했다. 다음은 그가 한 말의 일부.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극이 없는 사람이고 제가 하는 음악도 자극이 없는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세상에 멋진 가수들이 너무 많은 와중에 큰 자극 없는 저도 일종의 가수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름을...”


참가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린다.


“이 가수 노래 알아요?”

“요즘 친구들이 많이 들어요.”

“나, 이 노래로 처음 기타 레슨하고 그랬는데...”

“너무 소름이야.”

“정말 이 노래 많이 들었는데...”


대기실 반응을 보고 있으니 궁금해졌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듣는다고? 나는 모르는 가수인데? 젊은 사람 아님 인증인가?’ 싶은 그때, 55호님이 말했다.


“가끔 이 노래가 저보다 더 유명해져 버려서 제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건지, 노래가 저를 부르는 건지 헷갈리는데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불러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린다.


"기운이 엄청 빠져 보이시네. 긴장하셔서 그런가."

"되게 궁금증 들게 만드네."



“사랑은 언제나...”


낮은 음성으로 시작하는 55호님의 첫 소절에 “아... 맞네... 와...” 탄성을 내지르는 대기실 참가자들. 한 자 한 자 정성껏 노래를 부르는데 어? 약간 이상하다. 가사에 있는 대로 ‘쉽지 않게’ 부르는 듯한 표정이다. 경연에 참가하는 사람 치고는 굉장히 힘겨워 보이는, 지친, 무기력한. 반드시 1라운드를 통과해야겠다는 의지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그럼에도 묘하게 그의 노래는 계속 듣고 싶어지는, 끝나는 게 아쉬운 이상한 상황.


55호님이 말한 대로 ‘제가 이 노래를 부르는 건지 노래가 저를 부르는 건지 헷갈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게 들렸다. 마치 경연은 잊은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그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고, ‘또 어떤 날에는 누구라도 상관 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은 위로 받고 싶은 그의 진심을 고백하는 듯했다. 나도 한 번은 느껴봤던 감정들. ‘누구라도 상관 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 싶은 순간’에 그의 노래를 듣는다면, 듣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것 같았다. 그제야 참가자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 <우리들의 발라드>에서 <소주 한 잔>을 부른 민수현씨에게 정재형이 한 말도 생각났다. “폐부를 찌른다”라는. “가사 하나하나가 다 나의 이야기 같아서 날 위해서 불러주는 노래 같았어요”라는 그의 심사평을 나는 55호님에게 그대로 들려주고 싶었다. 이 노래가 청춘의 고달픔을 그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곽진언 커버)와 청춘들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 <청설>(이제 커버) OST로 쓰인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알고보니 ‘일종의 고백’은 55호님이 지난 2015년 2월 발표한 자작곡이었다. 10년 전 그가 불렀던 ‘일종의 고백’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 검색해서 들어봤다. 거기에는 또 다른 느낌의 55호님이 있었다. 그날 내가 방송에서 봤던 55호님과는 또 다른. 그 처음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는 심사위원이 있었으니 바로 가수 이혜리였다.

“제가 어렸을 때 처음 가사로 충격을 받았던 노래였던 것 같아요. 정말 가사가 너무 좋아서 처음 들었을 때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나고. 오늘 이렇게 라이브로 듣는데 훨씬 큰 감동이 있었다. 한 가지 부탁을 드리자면, 기운 없으신 이런 느낌으로 불러주신 게 너무 좋거든요. 그렇지만 식사는 거르지 마시고...”


노래로 위로를 받은 것 같은 심사위원들의 소감은 계속되었다.


윤종신 “노래는 사람의 모든 감정을 다루잖아요. 되게 힘들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위로가 되는 거거든요. 55호 가수님이 갑자기 너무 힘찬 가수가 안 됐으면 좋겠어요. 본인의 리듬대로 기타 치고 노래해 나가셨으면 좋겠고 다음 곡이 너무 기대됩니다.”


발언 도중 울음을 터트린 건 가수 백지영이었다.


백지영 “하... 저는 제가 살면서 제 마음이 막 무너질 정도로 힘들거나 슬프거나 그런 순간이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았거든요. (울먹이며) 오늘 우리 55호님의 이 노래를 제가 들으면서 그때가 좀 생각이 났어요. 제가 진짜 어딘가 이렇게 숨어서 무언가에 위로 받고 싶을 때 필요했던 노래였던 것 같아요. (눈물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무안했는지) 이거 되게 싼 눈물인데... (참가자들이 웃는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감정을 낱낱이 드러낸 글보다 절제하고, 정제한 문장을 고르고 골라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에 더 마음이 기운다. 내가 글로 만나고 싶은 것은 날것의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을 작가가 어떤 식으로 해석했고 받아들여 정리했는가이므로.


물론 100%는 아니다. 때로는 내 감정에 따라서 찌질하고 밑바닥을 보여주는 글에 나를 투영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그런 글을 쓰면서도). 내가 듣는 노래도 그렇다. 슬픔에 끝이 있다면 그 가장 끝까지 갈 것 같은 노래를 골라 1시간 듣기도 한다. 윤종신의 말처럼 힘들다고 이야기 하는 가수나 노래에서 위로를 받으니까. 나는 그게 음악의 힘 같다.


간증(?) 같은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들으며 ‘여기 오면 뭔가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참가하게 됐다’는 55호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래가 끝나고 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 이런 저런 내용을 살펴 보던 중에 55호님의 2024년 연말 공연을 본 팬이 쓴 글을 보게 되었다. 55호님과 그의 노래를 이보다 더 잘 말해주는 건 없을 것 같아 일부를 옮겨 본다.


“삶의 아주 작은 부분을 깊게 조망하는 것들을 좋아한다. 빌보드나 메이저 음악방송에서는 절대 다룰 수 없는 밀도, 지루하리만큼 주의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빠르고 강렬하게 짧고 자극적이게는 외치는 게 트렌드인 시대에 꾸준히 느림을 노래하는 사람, 단어를 음절을 자음과 모음마저 잘게 조각내어 노래하는 사람, 침묵마저 음악이 되어 버리는 노래. 이다지도 느리고 긴 그의 음악이 좋다.”


어쩐지 나도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계획에 없던 덕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몇 년 전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55호님이 밝혔던 “어제 하던 걸 오늘도 내일도 계속 하는 게 목표”라던 그의 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매 순간이 진심일 수 있도록. 방송 이후 그의 이번 무대는 'JTBC Voyage' 10월 23일 오후 5시 기준 106만회를 넘어섰다. 지금도 계속 올라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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