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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깡으로 한 거예요, 해야 되니까 하는 거야"

[내 인생의 심사평]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삶의 태도에 대하여

by 은경

"이건 깡이야. 이건 정말 깡으로 한 거예요. '나는 하는 거야, 해야 되니까 하는 거야' 이렇게 했는데 됐다는 게 저는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싱어게인4>에서 심사위원 가수 백지영씨가 75호님의 노래를 심사하며 한 말이다. 자신을 '나는 강한 가수다'라고 한 75호님은 과거에 활동하던 그룹 이름에 '강하다, 강한 에너지, 강함'이라는 뜻이 있어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고 밝혔다. 2006년 그룹을 해체하고 18년 만에 불러보는 노래인데 혼자서 부르는 건 처음이라고.


그룹 시절에는 내 파트만 부르면 되었지만 오디션은 다르다. 함께 노래하던 멤버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안무와 노래를 해내야 한다. 그 막막함과 고됨이 어떨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아이돌 출신의 심사위원들조차 "어렵겠다"라고 걱정하는 걸 들으면서 결코 녹록지 않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75호님은 준비하는 동안 "잘해야겠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단다. 정말 사랑하는 이 노래를 떨지 않고, 활동하던 당시의 그때를 회상하면서 잘 보여드리고 싶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 심사위원 태연은 "걸그룹 선배인가?" 추측했고, 백지영은 "안무가 있을 텐데 몸 좀 풀고 있지"라며 다소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무대를 바라봤다.


화면 캡처 2025-11-08 171132-보니.jpg


내 옆에서 함께 방송을 보던 남편이 그새를 못 참고 검색해서 75호님의 정체를 알려줬다. "샤크라래." 샤크라? 방송에서 종종 보았던 황보, 배우로 활동하는 정려원에 비해 활동이 적었는지 나는 75호님의 얼굴만으로는 걸그룹 시절의 그를 떠올리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무대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댄스곡이라 그랬나) 전문가들 눈에는 달랐나 보다. 노래가 안정적이라는 평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날 75호님이 부른 곡은 '난 너에게'. 무대가 끝나자 심사위원들은 환호했다.


"노래 너무 잘하신다, 춤추면서."

"노래를 너무 잘해. 잘해."

"(얼추 들으니까 목소리가 4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말도 안 돼. 이걸 (어떻게) 혼자 해."


윤종신이 처음 마이크를 잡고 "저는 사실 기대치가 높지 않았다... 18년 만에 부르는 거고"라고 말해 놀라면서도 솔직한 평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반전이 있었으니 그의 노래 실력을 바로 인정한 거다. "노래를 너무 잘하신다, 멋졌다"라고. 이어 백지영이 "응원합니다"라고 운을 뗐다.


"지금 랩 하고 노래를 같이 하셨잖아요. 그게 대단한 게 뭐냐면, 랩을 할 때의 호흡하고 노래로 전환할 때의 호흡이 좀 다르거든요. 근데 전환하는 그 타이밍이 너무 짧은 거예요. 그래서 노래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이건 깡이야. 이전 정말 깡으로 한 거예요. '어 나는 하는 거야, 해야 되니까 하는 거야' 이렇게 했는데 됐다는 게 저는 너무 감동적이었고 다음 라운드에도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백지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저렇게 해야 할 때가 있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따지기 전에, 일단 하고 봐야 하는. 해야 하니까 하는 순간들 말이야."


운동선수 김연아의 말도 동시에 떠올랐다. 훈련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에, "뭘 생각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그 유명한 말. 말해놓고 신경이 쓰였다. 혹여 내 말이 들렸을까 싶어서. 옆방의 고3 딸에게. 오늘도 독서실 대신 제 방을 선택한, 해야 하는 건 알지만 하기 싫은 마음을 겨우겨우 누르며 입시 준비를 하는 아이.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따라주지 않는 몸과 마음은 얼마나 괴로울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2025년 수능을 한 달여(이 글을 쓰는 시점 기준) 앞둔 지금, 이제는 좀 현실을 받아들일 법도 한데, 아직도 마음을 못 잡고 있는 아이를 보는 내 마음의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기대도 하게 되었다. 깡으로 다음 라운드의 기회를 잡은 75호님처럼 딸에게도 열정을 불태울 만한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지 않겠나 싶어서.


75호님이 이날 부른 노래는 '난 너에게'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가 부르는 노래는 늘 가사를 신경 쓰면서 듣게 되어서 그런지 일부러 가사를 한번 찾아봤더니, 허허. 이건 뭐 딸에 내한 내 사랑 고백인가 싶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된 거야 걱정하지마

항상 옆에서 널 지켜줄게 내게로 와


난 너에게 조금씩 가까이

넌 언제나 자꾸만 멀어져

하지만 나 너와 함께 있을거야

난 너에게 사랑을 원했어

넌 언제나 대답이 없었지

하지만 나 널 사랑해 언제까지나


>> 밀리의서재에도 연재합니다.

원래 돌아오려던 연재는 이게 아니었지만 ㅎㅎㅎ

써야하는 글이 있으면 쓰고 싶은 글도 있는 법이니까요. ^^

서바이벌에 대한 글이 너무 너무 쓰고 싶었거든요! 저의 최애 프로그램!

게다가 밀리의서재에서 하는 이달의 밀크 주제가 '에세이'래요.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요! 함께 써요! 힘껏 밀어주시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https://short.millie.co.kr/5mvw2e


#오디션 #서바이벌프로그램 #우리들의발라드 #싱어게인 #저스트메이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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