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아사나
요즈음 ‘끝’이라는 낱말을 곱씹는다. 무엇으로 시작되었던가? 퀼트 조각처럼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관념들이 한 유명인의 죽음으로 엮어진 듯도 하다.
평생 타오를 것 같던 양초도 모든 순간을 살아내면 어둠 속에 숨는다.
"일곱 개만 할게요." 사십 킬로그램을 어깨에 지고 앉았다 일어날 때에도 당장 바닥에 나뒹굴 것 같지만 어느덧 일곱 개가 찾아온다.
결국은 아사나를 향해 과정이라는 요기니의 말씀도 떠오른다.
지구상의 모든 삶들은 끝이 나고 만다. 그것이 언제쯤 문을 닫을지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시작과 끝이라는 관념 안에서는 과히 사소하게 느껴진다.
어떤 존재와 함께 하는 시간들도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일주일에 한두 번 감자칩이 잔뜩 들어간 떡볶이와 날치알 볶음밥을 나눠 먹는 회사 동료들과의 정다운 시기도 평생 주어지진 않을 테고, 난치병이 있는 고양이와 반려인의 여유로운 오후도 언젠가는 밤이 되어 저물 테다. 상상만으로도 눈물 나지만.
찰나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은 구태여 더 보태고 싶지 않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 말이니까. 평생을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 감히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얼마나 거만하고 옹졸한가.
한편 '끌려간다'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오후 11시가 넘은 시각. 불야성 같은 거리에 서있었다. 좀체 즐겨 입지 않는 차림으로.
그래서였는지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약속 상대를 만나고 일이 벌어졌다.
나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듯이. 계속해서 이끌려갔다.
경고도 없이 가까워진 달 같았다. 분명 정해진 거리가 있었는데, 마구 돌다 보니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그때 나는 '이끌림'을 처음 감각했다. 의도한 바가 있거나 특별한 감정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그냥 자석처럼. 마치 혼자서는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처럼, 몸이 자꾸 기울어졌다.
그날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한 번 더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다시 달은 적당한 거리를 찾은 것 같다. 지구는 본래의 자전축을 되찾은 듯하고, 시간도 많이 흘렀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끔씩 궁금하다. 나는 다시 기울어질까? 어쩌면 다시 기울기를 바라고 있나? 정답은 늘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