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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Jul 24. 2023

해방촌에서 어느 날

빨랫감도 없이 런드리 카페에 가다.

빨랫감도 없이 런드리 카페에 왔다. 

왼쪽 한 편엔 외국 드라마에 나올 법한 세탁기들이 늘어져 있고, 오른쪽 창가엔 푸른색 액자와 주황빛 조명 아래 할머니 두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눴다. 머무른 시간이 길었는지 유리잔 겉면이 흥건했다. 보라색 세로 줄무늬와 주황색 티셔츠. "어젠 닭을 한 마리 샀는데, 오늘은 삼겹살을 살까." 아직 한참이나 남은 저녁 식사를 고민하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면서, 근처 서점에서 산 소설을 꺼내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 목을 꺾고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을 한 무더기 싣고 가는 작은 마을버스가 한두 번 지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남자는 창 밖 자리에 앉아 연초를 피웠다. 그들을 구경하다가 길 건너 건물에 창이 열린 집을 바라보았다. 붉은 꽃이 핀 화분. 막 장을 보고 테이블에 둔 듯한 흰 가방. 오래 들여다보니 언뜻 성모 마리아 상 같기도 했다. 진실은 알 수 없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빨래가 다 되었다는 알림이다. 카페 손님 중 빨랫감을 맡긴 이가 자리에서 우물쭈물 일어난다.


책의 중간쯤 읽었을 때 따분한 마음이 들어 글을 쓴다.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맴도는 말들은 많았는데, 가만가만 앉아 말들을 정리하고 다듬을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가만있어주지 않았다.


연청색 셔츠를 입고 제 집만 한 배낭을 멘 남성이 들어온다. 저 배낭 안엔 온통 빨랫감일까? 배낭여행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땀방울 하나 맺히지 않은 희고 맑은 피부는 오히려 세탁방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가게 가장 안쪽까지 들이닥쳤고,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 점원은 짐을 정리했다.


“화분에 물만 주면 돼요.” 

이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뽀송한 얼굴의 그는 정말 이곳 직원이었다. 배낭은 내려놓고, 갈색 앞치마를 입었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길래 직원 교대가 이뤄진단 말이야! 읽던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둘레둘레 일어났다. 다 마신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자 앞치마를 맨 직원이 밝게 인사해 주었다. 


빨랫감도 없이 런드리 카페에 가 한참을 책만 읽고 왔던 그날의 여유가 가끔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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