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 않은 가족 이야기
여름이다. 복숭아와 옥수수의 계절. 요즘은 원물 그대로의 식품을 섭취하고 싶어 진다.
이를테면 감자를 그대로 쪄내거나 단호박을 쪄낸 것 같은. 제철을 맞이한 복숭아와 옥수수도 마찬가지다.
초파리의 습격으로 서울 집엔 '부엌금지령'을 내렸다. 이 금지령은 가을 해제 예정이다.
덕분에 모든 식사는 외부에서 하거나 조리가 필요 없는 것들로 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배달도 안 되는 원물 그대로의 음식이 당기게 된 게.
"엄마, 나 다음 주에 갈게."
내 딴엔 공유부엌을 찾을 수도 없으니 찾은 해결법이었다. 엄마 부엌을 이용하기로 한 거다.
지난봄. 엄마 아빠 사이에 앉아 제철 산딸기를 먹은 것처럼. 여름이 선사한 과일을 즐겨야지.
그러고 보면 지난가을이 떠오른다.
실로 오랜만의 가족여행이었다. 20년도 더 넘었을지 모를. 내겐 역사적인 여행이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복지 차원에 제공하는 리조트에 묵었다.
잔디가 가득 깔린 앞마당이 있고, 2층까지 합치면 100평은 될 것 같은 훌륭한 숙소였다.
각자 방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나름 부모님께 방을 배정해 드렸는데, 두 분은 고사하셨다.
엄마가 무서워해서 같이 자야 한다나 뭐라나!
조금 지나치게 달달하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두 분과 멀리 떨어진 방을 차지해 잠들었다.
그 엄마에 그 딸이려나. 나도 조금 무서워하며 밤을 보냈다. 그래도 여덟 살짜리 아이처럼 베개 들고 두 분 방을 찾아가진 않았다.
다음 날. 불국사에 다녀오고선 머리가 지긋하게 아파왔다. 오래간만에 차를 오래 타서였을까?
고소한 찰보리빵도 본체 만 체하고 끙끙대며 소파에서 눈을 붙였다.
저녁엔 동궁과 월지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나 때문에 취소되고 말았다.
엄마가 옆에 앉아 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소파 밖으로 축 늘어뜨린 손을 얼마간 잡아주기도 했다.
나는 문득 이런 일이 십여 년만의 일임을 알았다. 까마득이 어렸을 때나 엄마와 나는 손을 잡았다.
왜였을까?
난 엄마의 손길을 쉬이 쳐내는 아이였다. 그래서 엄마는 꽤 자주 서운해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마 말대로 '유별나고 예민'한 내 일부분을.
"어디 아픈가?"
"컨디션이 안 좋은갑다."
"아 자는데, 우린 방에 들어가서 티브이 보자. 아 깰라."
살짝 잠에서 깼을 때, 두 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티브이 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고 두 분 사이에 아홉 살 아이처럼 보살핌 당하고 싶었다.
내 손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아이였을 때처럼. 뒷산보다 크나큰 존재감을 자랑하는 부모님 옆에서 자고 싶었다.
어른이 된 나는 이제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몇은 감히 내가 부모님보다 낫다고 건방을 떨었는데. 결국 나는 두 분 덕에 이 모든 것들을. 그러니까 숨 쉬는 것부터 잠에 드는 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렇게 손에 꼽게. 부모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체온으로 받을 수 있었다.
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 내가 이렇게 연약해도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는 묵직한 신뢰가 아픈 상태임에도 나를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내 인생의 빈틈. 그러니까 모래만큼 작은 부분을 채워주어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줄 것임을 눈치챘다.
이번에도 엄마아빠 옆에서 복숭아랑 옥수수 나눠 먹으며 충만한 여름을 보내고 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