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든 아침이 온다죠?
알고는 있었다. 내가 많이 지쳤다는 걸. 그때까진 아마 주황불이었던 것 같다.
'아직은 괜찮아. 달릴 수 있어.' 쌩쌩 달리고 있던 내게, 빨간 불은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지난 추석 연휴. 본가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지 채 몇 분 되지 않을 때였다.
평소 같으면 내리쬐는 햇살이 비타민을 만들어 내 뽀송한 기분일 텐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직 채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꼭 돌아와야 한다면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실전에 옮길 가능성이 있는 어마어마한 자살 사고는 아니었다. 그냥 휙 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단상일 뿐.
그럼에도 이는 분명한 시그널이다. 이제는 그만 멈춰야 한다는. 빨간 시그널.
'이직해야지.'
그 생각을 한 지는 1년도 더 넘었다. 실제로 1년 전 이맘때 면접을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착할 대로 정착해 버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상에 젖어들었다. 이직할 곳을 마땅히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11시, 12시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는 '이직해야지.' 다짐하곤 했다.
그러다 빨간 불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직처를 구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러다간 새 직장을 다니기도 전에 나를 잃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당장 차를 버릴 수 없었다. 그간의 업무를 인정받아 조직장이 되고 말았다.
번아웃 상태의 나에게 조직장 임명은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축하받고 싶지 않았고, 어디 자랑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것이 나를 또 얼마나 옥죌까? 답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조직장'이라는 타이틀은 나를 괴롭혔다.
'00님만 믿을게요', '알아서 다 해주실 수 있죠?', '다음 달 매출 기대할게요!'
갖가지 말들이 쏟아졌고 웃어넘길 수 없었다. 실시간으로 뒷바퀴들이 헐거워졌다. 사고는 시간문제였다.
덜컹거리는 상태로 몇 주를 출근했다.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식은땀 흘리며 어디엔가 정차할 곳이 없는지 핸들을 붙잡은 운전자였다.
언제 부딪혀 '펑!'하고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나날이 반복됐다.
그러다 한두 군데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확실히 옮기겠다는 다짐은 없었지만, 어쨌든 광기의 운전을 선보이던 내게 그나마 발견된 쉼터였던 셈이다. 더 먼 길을 가지 못하더라도, 저기서 잠깐 쉬자. 저 핑계로 좀 쉬자.
업무 분담을 다시 정해야겠다고 상위 조직장이 말한 날. 면담을 요청했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몸까지 진동해 왔다. 잘 말할 수 있을까? 몇 년 간 형성된 이 커뮤니티는 이제 회사 동료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배신자 취급할까 두려웠다. 나 없는 조직이 나부터도 상상가지 않았다.
놀랍게도 상위 조직장은 내 이탈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맞노라고 답했다.
이후부터는 자연스러웠다. 3차 조직장에게까지 소식은 전달되었고, 나는 덤덤히 그간 힘들었고 이직처를 구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럼 모두 시원했느냐고?
절대 그렇지 않았다. 퇴사를 고했음에도 맛이 가버린 내 상태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초행길이긴 했지만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넘게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다시 지도를 보니 정말 잘못된 버스 정류장이었다. 이런 일만 두 번 있었다.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부서에서 누구보다 메일을 잘 쓴다고 소문난 나인데, 문장이 잘 써지지 않았다. 조사를 한두 군데 틀리게 적었다. '은'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의'를 적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명사도 곧잘 틀리곤 했다. 오타가 나는 게 아니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건, 동료들과 대화할 때 나타났다. 옆 팀 팀장에게 그네들의 새로운 팀원들의 안부를 방금 물어놓고는, 엘리베이터에 따서 한번 더 "팀원들은 괜찮아요?" 물은 것이다. 얼떨떨한 상대의 반응에 뜨끔 해서, "혹시 제가 방금 이거 물어봤나요?"하고 되묻자, 그는 그렇다고 끄덕였다.
고장. 사고는 나지 않았어도, 나는 단단히 고장 나고 만 것이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웹툰 원작 드라마를 최근에 보았다. 해당 에피소드에는 워킹 맘 에피소드도 있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의 감정마저 백 퍼센트 느끼지 못하고 미루다 병이 난다. 일명 '가성 치매'라는 병이다.
흡사 치매와 유사한 이 질환은 인지 능력이 약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기억력 저하마저 일어난다.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드라마에서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최근 내가 겪고 있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토요일이 되면 나는 거의 깨어있지 않는다.
전날 자정쯤 잠에 들어도 토요일이 되면 기본 오후 2시, 좀 과하다 싶으면 오후 5시쯤 깨어난다.
배도 고프지 않지만 일종의 의무감에 한 끼 식사를 마친다. 그러면 다시 잠이 온다.
참을 생각도 없다. 다시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그러면 오후 10시쯤 깨는데, 2~3시간쯤 깨어있을까? 다시 자정쯤 되면 잠들어서 일요일을 맞이한다.
이렇게 지낸 지 수개월은 된다. 무기력해서 잠이 오는 건지, 잠을 자다 보니 무기력해진 건지, 앞뒤는 알 수 없다. 총기난사 사고 현장에 있는 악몽을 꾸거나 같은 엑셀 파일 작업을 반복하는 꿈을 꾸는 날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지금은 인수인계와 이사 준비, 해외여행 준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주간이다.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만 버티고 있다. 아직도 내 바퀴는 덜컹거리며, 당장이라고 빠져버릴 듯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다. 2주만 지나면, 3주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위로하며.
그럼에도 이 하루하루를 또렷이 보내고 싶다. 미래에 지금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는, 이 지경이 되도록 달리지 않고 싶다. 무섭다. 다시 이런 상태를 맞이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