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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잰니 Jun 23. 2024

행복하긴 합니다만,

남은 날들이 숙제처럼 느껴질 때

샤워를 하며 문득, 내일부터 다가올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 모든 요일들이 떠오르며 갑갑한 심정이 되었다. 이 모든 삶들이 보이지 않는 숙제 같다고. 채워야 할 분량이 정해진 과제. 그러나 빈 화면에 이제 몇 줄 겨우 적어 넣은. 마지막 온점까지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남아있는데, 이걸 언제, 뭘로 다 채우나 하는 아득함. 무엇을 위해, 이다지도 묵묵히 돌파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 내게 주어진 시간이 영겁도 아닐 텐데. 감히.


오해를 풀기 위해 말해두자면, 근래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 행복해!' 몸서리 칠 정도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행복은 찰나에 가깝다. 잘 구운 빵에 바질페스토를 발라 방울토마토와 함께 먹을 때. 햇빛은 레이스 커튼을 통해 스며들고,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로맨틱하며, 두유 라테는 적당한 온도에 고소한 맛이 난다. 빈자리가 듬성하게 있는 이른 아침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 그 위로 부서지는 빛깔들,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 일하러 가는 여인, 자전거 타는 중학생, 산책을 나온 강아지와 인간. 캠핑 의자와 은색 돗자리. 떡볶이를 입에 물고, 비눗방울을 불고. 왁자지껄 떠들며 맥주를 마셨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가, 문득 지는 해에 일순 조용해지는 그런 순간. 그런 찰나에 행복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남은 날들이 숙제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삶의 평탄함 때문일까. 일상의 평온함이 원인일까. 매일 새로운 국가를 돌며, 오늘은 열기구를 타고, 어떤 날은 우주선에 오른다면. 새로이 다가오는 쓰이지 않은 역사의 날이 고단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그저 출근하기 싫은 직장인의 실없는 넋두리일지 모르지. 어쩌다 한번 가슴께가 뻥 뚫린 듯이 차오르는 공허는 소파 옆자리에 약속 없이도 앉아있는 동반자가 생긴다면 사라질까. 모를 일이다. 샤워하는 동안 생각이 너무 많았던 탓일지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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