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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Mar 30. 2020

그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

서점에서 만난 작고 소중한 인연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꼭 쓰고 싶었다. 삶의 면면, 가까운 곳에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걸 목격하는 목격자이자 경험자로서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흐르는 이곳의 일상을 말해주고 싶었다그들의 이야기에 지쳤던 어깨가 솟아나거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마음으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라는 말 들어봤을 것이다.

“타생지연”

타생의 인연(因緣)이라는 뜻으로, 불교(佛敎)에서 낯 모르는 사람끼리 길에서 소매를 스치는 것 같은 사소(些少) 한 일이라도 모두가 전생(前生)의 깊은 인연(因緣)에 의(依) 한 것임을 이르는 말


지나가다 스치는 인연에도 뒤돌아보기 마련인데,

누군가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공간에서의 기다림은 불특정 다수에게 심판받는다는 심정으로 손 끝 세포까지 곤두서 있다. 즉, 지나가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도 죽을 수 있지만 작은 인기척만 해줘도 인생이 아름답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상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전생에 우린 분명 깊은 인연이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당신에 대한 감정의 크기를 키우고 밀도를 높인다.


서점을 운영하며 한 가지 자라난 것(잘한 것이 아닌 성장하고 있다는 의미)이 있다면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세심하게 마음을 헤아리는 ‘사려 깊음’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상대의 눈을 살피며 고단했을 하루를 가늠해본다.


문을 열 때의 행동과 들어와서 두리번거리는 모습, 시선이 머무는 곳, 첫마디를 뗄 때 얼굴의 미묘한 표정과 입 밖으로 꺼낸 첫소리가 무엇인지 말의 언어와 행동 언어를 보면서 채워나갈 대화의 시동을 건다.



오늘은 아이와 자주 오는 키가 훤칠한 아빠 손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들른 그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시키고 긴 손가락으로 찬찬히 책장 속 책들을 어루만진다.


이런 책이 있었네요. 여길 오면 못 보던 책들을 발견해서 좋아요. 예전에는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일이 바빠서인지, 육아가 고되서인지 결국 사는게 바빠서겠지. 한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는 그는 연신 동네에 서점이 생겨서 좋다는 말을 하며 잠시나마 책을 보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 우리는 서로가 좋았던 책을 추천하고 각자의 일상을 탐하며 단어의 나열 정도만 말했던 아이가 서툴지만 문장을 구사하는 순간들을 함께했다. 아빠를 닮아 늠름하고 선한 웃음을 지닌 아이는 씩씩하게 의자에 올라 그림책을 읽었고 나는 늘 한 잔의 커피와 우유 그리고 과자를 준비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몇 번 방문했을 때, 아내가 오면 좋아하겠다고 말하며 그 주 주말에 단란한 가족 나들이로 서점에 들러 줌파 라히리에 <저지대>를 구매해갔다. 긴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고민 없이 이 책을 건넸고, 꽤 두꺼운 책이었음에도 아내는 빠져서 읽다가 너무 좋았다며 라히리의 다른 소설도 주문을 요청했다. 세 가족의 책 취향과 관심사를 공유하니 심적으로 부쩍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고 안온한 날들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도 동시에 비례했다.



어느 날이었다. 10월의 어느 날,

그는 내게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고는 음악 틀어드리는 일인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좋은 노래가 뭐냐며’ 자세한 예시를 곁들이면서


“저요? 음.. 이문세의  <그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적당한 프로그램에 선곡을 요청해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겠다는 말에 베푼 호의 감사히 받겠다며 인사를 전했고, 속으로는 라디오 방속국에서 선곡 리스트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실무자 정도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그 이야기가 기억에서 잊힐 때 즈음 파일이 담긴 메시지 하나가 왔다. 불현듯 예전에 나눈 대화가 떠올랐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유 있는 노래, 사연과 신청곡을 들어보는 시간입니다. 어떤 이유와 함께 신청곡 보내주셨는지 만나보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송디(송디제이)
저희 동네에 괜찮은 책방이 있는데
어느새 일주년이 됐어요
책방에서 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주 가는 손님들이 알아서 선물도 하고 축하해주는 서점이랍니다.
그래서 저도 노래 선물드리고 싶어요”

<그때 내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 이문세



서점의 일주년을 축하하며, 사연을 보내고 마음을 써준 행위가 단순 물성이 아닌 정성으로 다가왔을 때의 감동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지난 시간들, 일련의 과정들이 한 곡에 녹아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뜨거운 눈물을 삼키게 했으니..
괜찮은 책방이라는 말에 다 괜찮아지는 것만 같다. 모든게 전부.

‘다 버릴 수 있어. 내 긴 슬픔 상처.
다 주어도 좋은, 다 잃어도 좋은’


노래 속 가사에 내 마음을 대신하고 싶다.


괜찮다면 그때 내가 당신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 자리를 빌려 하려고 한다. 언젠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등불 같은 이 마음 고이 간직해서, 언제든 조금씩 꺼내보겠다고. 영혼을 치유하는 엄마의 밥처럼, 서점이 그리울 때마다 틀게 되는 플레이 리스트가 될 거라고. 너무 고맙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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