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가 키우는 고양이 물루처럼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장 그르니에 『섬』 , 고양이 물루 37p
한 카페에서 우연히 낙낙하게 기대어 햇빛을 쬐고 있는 고양이를 만났다. 고양이는 귀여운 반달 눈으로 앞 발을 쭈욱 뻗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의 단잠을 방해하지 마라’는 듯 다가오는 인기척에도 아랑곳 않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말이다. 그게 신기해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일행이 말했다.
:
“왜 이렇게 처량해 보여”
처량? 나에게 한 소리인가?
호기심 짙은 솔~ 톤의 목소리로 “와 고양이 좀 봐, 너무 귀엽잖아”라고 외치며 달려갔는데, 어째서 돌아오는 대답은 처량하다는 말인 거지?
예상 못한 답변에 의아하다는 듯 양 손과 어깨를 위로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순식간에 정의된 그 감정이 틀리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속내를 들킨 것에 민망했는지 코를 찡긋 거리는 내 표정은 무척이나 어색했고, 바로 앞에 있는 하얀색 수납장에 비친 몸짓은 얼어있는 것처럼 굳어보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둥글둥글 말을 예쁘게 뭉쳐보려 애써봐도 손바닥에 닿지 못하고 힘 없이 공중에 흩날리는 진눈깨비처럼 말은 포르르 사라지고 행동만 남아 있던 순간들.
쉽게 말하자면, 움켜쥔 모래가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듯이 감정을 숨기고 포장한 말들은 보란 듯 틈을 보이고 새어나가 비워져 버린다는 사실을.
꼭 몸의 언어가 말과의 힘겨루기에 이겨서 승리를 외친 것처럼 말이다.
이 날의 내 행동에는 많은 힌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가령 커피를 마실 때 작게 뱉었던 한숨,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맛있다고 말하지만 잡념이 많아 보이는 눈동자, 축 내려간 어깨와 들뜬 목소리의 부조화 등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안쓰러움 같은 것들이 묻어있었겠지.
사실 나는 그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 없는 고양이의 세계가 커 보이고 내 세계가 작아 보이는 건 단지 책의 한 구절에 압도당해서일까. 아니면 앞날에 대한 걱정 따위 관심사가 아니라는 듯 통달한 고양이의 태도가 도약을 위한 침묵의 시간이라 생각돼 닮고 싶다고 느껴서인 걸까.’
견줄 수 없는 같은 의미를 두고 생각에 빠져드는 건, 책 속 문장에 내 인생을 대입해 답을 얻고자 하는 희망 때문 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너무 초라하고 처량해서 그 문장을 붙들어 움켜쥐고 싶은 마음.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겨 자신들을 살찌우는 정기를 얻는 짐승처럼, 나도 노동을 하는 것처럼 골똘하게 휴식을 잘 취한다면 ‘그 침묵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엄청난 도약의 발판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바람과 희망 말이다.
이 마음이 언제 꺾일 줄은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닌 고양이로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자신이 고양이인 것에 만족해하는 순진한 아름다움을 지닌 물루처럼, 유용해야 하고 쓸모 있고 싶어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 장 그르니에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물루가 되고 싶다.
더 정확히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진 짐승의 세계를 고스란히 흡수해서 도약할 힘을 모았을 때 거침없이 달려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