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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국 Aug 23. 2023

2. 혹독한 여름을 건너며

마흔 이후의 도전

8월을 지난다.


역대 최고로 더운 여름이 매년 경신된다고 한다. 한국이 '카눈' 태풍으로 혼란스러웠던 일주일 간 괌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돌아온 인천 공항의 밤공기는 서늘해져있었지만 그런 안심이 무색하게 다음날부터 다시 폭염특보가 이어졌다.


혹독한 여름이다

이번 여름엔 자극적인 여러 사건 사고가 있었다. 학교 선생님의 극단적인 선택에서부터, 일상 공간에서의 칼부림 사건들. 출근길에 폭행으로 사망에 이른 누군가의 죽음. 그런 일들이 멀리서 일어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애써서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않을까 라고 미뤄보지만 내 아이의 학교에서, 내 출근길 퇴근길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일상적으로 지나치던 공간에서 목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그런 기시감은 잠깐이고, 어쨌든 매일 출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유치원에 가며 자라났다. 웃고 울며 여름을 살았다. 벅찬 순간도 있었고 좋은 기억도 남았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있었다. 목표로 했던 책들은 많이 못 읽었고 다이어트도 실패했다. 휴가는 쉼보다는 떠들썩함으로 채워져 오히려 회사에 오니 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이 정도의 사람이구나. 를 느끼는 여름이다.


모기를 잘 잡게 되었다

40대가 되어서 그 전보다 잘할 수 있게 된 한가지를 꼽자면 바로 '모기잡기'다. 나는 행동이 굼뜬 편인데 이상하게도 아이 둘의 엄마가 된 후, 모기를 아주 잘 잡는 인간으로 탈바꿈 했다. 다른 행동에 있어서는 빠릿해지지 않지만 벽에 붙은 모기를 찾아내는 순간만큼은 온 신경을 집중해 빠르게 손바닥으로 후려쳐 잡는다. 승률이 좋다. 어쩌다 놓치더라도 매의 눈으로 모기의 움직임을 쫓아 잡고야 만다. 피가 탁 튀는 모기를 잡고나면 오늘 밤 아이가 평온하게 잠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부심섞인 모성애가 차오른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요리를 레시피를 보지 않아도 할 수 있게 된 것, 아이가 아프거나 돌발적인 행동을 취해도 비교적 잘 대처할 수 있게 된 것. 회사에서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게 된 것. 그런 것들이 40대가 되어서 그 전보다 잘할 수 있게 된 것들이다. 경험이 많아진만큼 두려움과 좌절감, 자괴감 같은 것은 줄어들고 임기응변과 타협에 능하게 되었다. 익숙한 것들에 머물며 안정감을 꾀하는 반면 새로움에 대한 설렘, 두근거림 같은 건 사라졌다. 괌으로의 이번 휴가는 국내여행만큼의 설렘도 없었다. 뭘 해도 시큰둥 해졌는데 그 와중에 드라마나 예능보다 뉴스가 더 재밌어진 건 내가 나이들었다는 반증인지.


정말 점프 업이 필요한 걸까?

안정적이고 무난한 일상이 이어지는게 싫은지, 남편의 이민병이 도졌다. 또 캐나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캐나다에 자기가 확실히 잡을 수 있는 금광이 있다는 둥 허황된 꿈을 늘어놓는다. 설령 금광이 있다 해도 왜 나는 그의 말에 시큰둥 할 수 밖에 없는지. 재작년의 1년 살기에서 겪었던 캐나다의 일상이 결국 일상임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어디에 있든 좋은 시간과 힘든 시간은 공존하고 그럴거라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사람에 기대지 않는 남편의 결론은  캐나다 쪽이었던 것 같다. 50대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맹목적이고 무모한 도전, 캐나다 이민을 인생의 '점프 업'쯤으로 생각하는 남편의 이민병을 낫게 할 방법은 뭘까. 일단 이사를 가면 좀 잠잠해 지려나.


어젯밤 아이의 수학 숙제를 풀어주다 옆에서 기함을 했다. 풀이과정을 깔끔하게 쓰지 못하는 아이에게도 어이가 없었지만, 간단한 계산 문제도 푸는 방법을 다 까먹은 내 자신도 한심했다. 그리고 고작 초등학생의 문제가 이토록 어려운데 앞으로 중, 고등, 대학교 동안 어려운 공부를 이어가야 할 아이도 안쓰러웠다. 공부를 안하면 살 수 없는 이 땅과 다르게 저쪽으로 가면 공부를 안해도 잘 살 수 있을까? 그건 아니지 않을까.


점프 업 좀 안하면 어때, 좀 대충 살면 어때. 그런 마음을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말하면 대한민국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좀 내려앉으면 어때, 좀 쉬는게 어때. 하루가 멀다 하고 자극적인 기사가 올라오는 네이버 메인 전원을 까맣게 암전시키고 그냥 다 좀 아무 것도 안하고, 안보면 어떤지.


날이 좀 시원해지면 저녁 한강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먹어야겠다. 멍 하니 강물이 흘러가는 거나 쳐다보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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