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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아빠 Jul 15. 2023

할머니는 호박죽, 손자녀는 호박수프

최고의 레시피는 변하지 않는 사랑

 어릴 적 나는 호박죽을 정말 좋아했다. 달콤하고 끈적한 식감과 쫄깃한 옹심이의 조화가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부모님을 따라 결혼식장에 갈 때면 늘 호박죽을 여러 번 먹었고, 집에서도 엄마가 한 냄비 가득해놓으면 네 가족 양 중 절반은 늘 내가 먹어치웠다. 그런 나를 위해 엄마 역시 호박죽을 자주 해주셨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호박죽을 먹을 기회가 많이 없었다. 아무래도 입맛이 변한 것도 있었을 테고 호박죽이라는 음식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는 흔한 음식은 아닌 것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도 변하고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도 변한 것 같다. 결혼식 뷔페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호박죽은 잘 볼 수 없게 되었고 그 자리를 다른 호박 요리가 대신했다.


제주에 내려오고 나서부터는 다양한 요리 재료를 얻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우리 집은 작은 텃밭에서 기르는 상추, 고추, 부추 등과 같은 텃밭 작물 수준이다 보니 특별할 것은 없지만 주변 이웃들은 때로는 노란 늙은 호박을 주시기도 하고 주먹보다 조금 큰 귀여운 사이즈의 초록색 호박을 주시기도 했다. 아내는 그런 호박을 받으면 위쪽을 잘라 뚜껑을 만들고 속을 파내고 안에다가 다양한 재료를 넣어 단호박 샐러드를 만들어주곤 했다. 내가 어릴 적 먹는 호박죽 대신 이제는 단호박 샐러드가 트렌드가 된 것이다. 맛도 좋고 영양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는 만큼 호박을 구해오면 아내는 늘 단호박 샐러드를 만들어줬다. 내 입맛을 잘 아는 아내는 종종 치즈까지 뿌려 단짠 별미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외출을 간 사이에 엄마가 단호박 두 개를 구해오셨다. 엄마도 아내가 해준 단호박 샐러드를 좋아하셨던 터라 늘 그렇듯 단호박을 쪄서 아이들에게 내밀었더니 각각 10세, 8세인 우리 아이들은 단호박 수프를 달라고 요구한다. 아내는 단호박 샐러드를 주로 만들었는데 아이들을 위해서는 가끔 단호박 수프를 해주었다. 세월이 변해 호박죽이 단호박 샐러드가 되었고 이제는 단호박 수프로 변했다. 단호박 스프라고 하는 멋진 말이 엄마(아이들에게는 할머니)에겐 늘 아들에게 해주었던 호박죽을 떠올리게 하셨나 보다. 엄마는 재빨리 주방을 뒤져 찹쌀가루를 찾아냈다. 호박죽은 은근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찹쌀을 불려서 믹서기에 갈아내야지 그 식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당장에 배고픈 아이들에게 밥때를 놓치면 어디서 간식거리를 주어먹고는 배부르다며 안 먹겠다고 할 게 뻔한지라 마음이 급한 엄마는 찹쌀가루가 있음에 안도한다. 잘 쪄낸 단호박을 믹서기에 갈고 물 한 컵을 넣고는 돌리려는 순간 아내가 집에 도착한다.


엄마 : "아이들이 단호박 수프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지금 만들고 있다."

아내 : "엄마 물을 왜 넣으셨어요. 우유를 넣으셔야죠."


엄마는 비로소 깨닫는다 호박죽엔 물을 넣었지만 호박 수프엔 물이 아닌 우유가 들어간다는 것을. 거기에 아내는 찹쌀가루가 꺼내져 있는 것을 보고 찹쌀가루는 어디에 쓰시려고 하는지 묻자 엄마는 호박을 갈아서 끓을 때 넣으려고 한다고 답한다. 아내는 단호박 수프엔 찹쌀가루를 넣지 않고 우유와 버터를 넣어서 끓인다고 알려준다. 아이들이 단호박 수프를 해달라고 말했을 때 줄곧 내가 어릴 때 자주 해주셨던 호박죽만 생각하고 자신 있는 요리를 신나서 끓여주려 하셨던 엄마의 마음과 다르게 세월은 참 많이 흘렀고 호박죽이 이제는 단호박 수프가 된 시대에 살고 있었다. 삼대가 함께 모여 살다 보니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방식대로 옹심이를 넣은 호박죽을 해주었었도 충분히 잘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으니 내 DNA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호박죽을 먹고 좋아할 것이다. 호박죽이 설령 단호박 수프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엄마, 아내로 이어지는 자식 사랑일 것이다. 손자녀들이 해달라는 단호박 수프를 당신이 아들을 위해 해주었던 호박죽을 떠올린 엄마도, 아이들이 말하면 뚝딱 단호박 수프를 해주는 아내도 모두 음식 가득 정성스레 들어간 사랑이 최고의 재료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정성스레 끓인 단호박 수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양파를 조금만 넣으라는 아내의 말에 엄마는 당신의 방식으로 조금을 넣었을 뿐인데 아이들은 양파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며 거부, 엄마와 아내만 신나게 맛있는 단호박 수프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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