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 그리고 우리
내 삶은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행복이 넘치고 풍요롭다. 하지만 이런 행복과 풍요는 정신 승리에 기반한다. 통장을 보면 30대 남성 평균 이상의 빚이 있고,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 가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겪어야 할 과정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런 나를 살짝 불편하게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어 얘기해보려 한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삶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내 삶이 의미가 있는 경우는 아주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 정도에게만 해당한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 노력이라기보다는 타인의 수용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수용 이전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에게 수용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 역시 내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보니 불행하고 힘들다는 사람을 보면 참견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것을 속으로 삼켜내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그들이 수용하기 위해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내가 그들의 삶에 참견하지 않는다. 아무리 선한 행위도 원하지 않는 친절이라면 폭력일 수 있다. 게다가 내가 걷는 이 길은 적어도 내 주변에선 듣도 보도 못한 길이다. 나의 모든 첫걸음이 내 인생에서의 첫걸음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걸어가 보지 못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 진짜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내 주변엔 내 삶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나 된다. 그들의 말 중 태반은 그 길이 쉽지 않고 어렵고 오히려 좋은 길이 아니니까 선택 안 한 거지 누가 좋은지 몰라서 선택 안 했겠냐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나보다 행복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육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고된 이별을 준비하는 육아라는 말에 기겁하는 부모들이 많다. 작별, 이별은 마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기에 그런 것이다. 단어의 선택은 늘 조심스럽지만 결국엔 공통된 관념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아주 미묘한 차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수능 문제에 나온 작가의 의도를 묻는 것과 같다. 문제에선 답이 이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조언을 새겨들으려 노력한다. 그들의 조언은 친절일 것이다. 조언이 현실적으로 내 삶에 반영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친절은 내 마음에 감사함을 더할 것이다. 늘 감사해하는 마음. 늘 감사해하는 삶.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불편감을 주지만 그마저 감사함으로 포장하는 정신승리가 내 삶의 비결이다.
나는 내 삶을 중시한다. 나에 대한 인식을 중시한다. 나를 인지하는 것을 중시한다. 내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뇌를 습관으로 삼는다. 늘 나를 고민한다. 그렇게 나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너를 본다. 나에게 너는 내 아내다. 내 아내와 나는 성경에서 말한 것과 같이 둘이 만나 하나 되어 한 몸을 이룬 유일한 나와 같은 존재이다. 내가 흔들리면 아내와의 관계도 아내도 흔들린다. 이것은 본질이고 뿌리다. 그렇게 둘이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 내 삶의 본질이다. 행복의 근원이다. 여기에 확장된 관계는 우리 즉,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나와 네가 만나 이뤄낸 사랑의 결실이다. 다만 절대 나와 너처럼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분리된 인격체다. 다른 존재다. 반드시 이별해야 하는 존재다. 이웃과 같다. 마을 이웃들이나 아이들이나 조금 더 친하냐 아니냐의 깊이 차이지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이것을 뭉뚱그려 비본질이라고 한다. 본질은 나와 너 즉 부부, 사랑이고, 비본질은 이를 둘러싼 모든 관계에 있다.
내 행복의 근원은 사랑이라는 본질에서 시작하여 비본질로 뻗어나간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비본질이기에 그것이 내 본질적인 행복을 앗아갈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비본질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착각한다. 고액의 연봉, 여유로운 삶, 고층의 비싼 아파트, 편리한 도심의 기능 등 이런 것들은 비본질이다. 본질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본질을 쫓느라 우리는 종종 본질을 놓치곤 한다. 그렇게 본질을 놓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은 정작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못한데 다른 사람들의 삶에 참견을 한다. 이것을 아가페로 보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도 그냥 아가페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기로 한다. 내 본질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이기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본질이 아닌 것에 시간을 쏟는 자체가 무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