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설계되던 날, 신은 도면 위에 붓을 올렸다.
붓끝에서 흘러내린 먹물이 어떤 이의 이마에는 별표로, 어떤 이의 등에는 그냥 점으로 맺혔다. 신은 특별히 악의를 품지 않았다. 다만 그림이 그렇게 그려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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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준혁은 열두 살 때 첫 번째 전국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가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준혁도 새벽에 일어났다. 문제집도 풀었다. 틀린 문제 앞에서 멈추기도 했고, 모르는 개념 앞에서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노력은 뿌리가 달랐다. 씨앗 자체가 달랐다고 해야 할까. 같은 땅에 심어도 어떤 씨앗은 처음부터 더 깊이, 더 빠르게 뻗어나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올림피아드 당일, 준혁이 시험장에서 나오는 장면을 우연히 본 것은 교육청 장학사였다. 그는 다른 아이를 보러 왔다가 답안지를 내려놓는 준혁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직감했다. 긴장이 아니라 여유였다. 장학사는 담당 교사에게 물었고, 교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원래 그래요." 그 한 문장이 준혁의 이름을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올렸다. 신문에 실렸고, 대학교수가 찾아왔고, 영재 프로그램의 문이 열렸다.
준혁은 그 이후에도 계속 공부했다. 더 어려운 문제를 찾았고, 더 깊은 이론을 파고들었다. 노력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그를 향해 문을 열어놓은 상태였다. 그가 걷는 길에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이정표를 세운 것은 그의 실력이 아니라 장학사가 우연히 그 시험장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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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도현은 같은 학원, 같은 책상,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 오늘도 새벽 두 시까지 연필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 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지우개 가루가 쌓인 방바닥에는 틀린 흔적들이 눈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준혁이 한 번 읽고 넘어가는 공식을 도현은 스무 번을 써야 겨우 외웠다. 그 스무 번이 부끄럽지 않았다. 다만 억울했다. 자신이 게으른 것이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더 억울했다.
도현도 성과가 없진 않았다. 지역 대회에서 입상했다. 교내 시험에서 상위권을 놓친 적이 없었다. 교사들도 그를 알았고, 성실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성실하다"는 말과 "저 아이를 봐라"는 말은 달랐다. 세상이 누군가에게 손가락을 뻗을 때, 도현의 이름은 항상 그 손가락이 닿기 직전에 멈추는 자리에 있었다.
전국 대회를 앞두고 도현은 두 달 동안 수면을 줄였다. 문제 유형을 분석했고, 오답 노트를 세 권 채웠다. 그 해 대회장에서 도현의 점수는 역대 개인 최고였다. 하지만 준혁도 나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론이 와 있었다. 카메라는 준혁을 찍었다. 도현의 점수는 기록지에 남았고, 준혁의 얼굴은 다음 날 신문에 실렸다.
도현은 그날 저녁 화장실 칸에 혼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려면 희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 시점의 도현은 희망인지 오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어떤 감정 위에 간신히 서 있었다. 그는 손을 모았다.
*신이시여, 저도 보이게 해주십시오.*
기도는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진심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달라졌다.
*준혁이 한 번만 틀리게 해주십시오. 딱 한 번만요.*
그는 그것이 나쁜 생각인 줄 알았다. 그래서 더 작은 목소리로 빌었다. 마치 작게 말하면 신이 못 들을 것처럼. 기도가 끝나면 항상 스스로를 탓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보다 더 깊은 곳에는, 탓할 상대가 신밖에 없다는 더 조용한 절망이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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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체육관에는 박서연이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코치가 처음 그녀의 점프를 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링크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퍼졌다. 열네 살의 서연은 카메라 앞에서 웃는 법을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웃었고, 그것이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서연도 넘어졌다. 수없이 넘어졌다. 빙판이 뺨을 할퀴는 감각을 서연도 알았고, 발목 인대가 찢어지는 소리를 서연도 들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고, 밥보다 스트레칭을 먼저 했고, 또래 아이들이 학교 축제를 즐길 때 링크 위에서 혼자 음악을 돌렸다. 노력 없이 재능만으로 선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노력은 세상에 더 잘 보였다. 넘어지는 장면조차 그녀에게는 예뻐 보였고, 일어나는 장면은 더 극적으로 보였다. 카메라는 아름다운 것을 향해 저절로 돌아갔고, 서연은 그런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그냥 스케이트를 탔다.
그녀의 첫 전국 데뷔는 사실 실수로 만들어졌다. 원래 출전할 선수가 부상으로 빠졌고, 서연이 대타로 투입되었다.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링크에 올라선 서연을 본 해설위원이 방송 중에 말을 잃었다. 그 침묵이 클립 영상이 되었고, 그 영상이 퍼졌고, 그 다음 날 서연의 이름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준비된 무대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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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옆 링크에서 최아름은 발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다시 점프했다.
오늘 세 번째 넘어짐이었다. 빙판이 차갑다는 것을 오래전에 잊었다. 이제는 그냥 딱딱하다는 것만 알았다. 아름의 기록지를 보면 나쁘지 않았다. 지역 대회 금메달이 세 개였고, 기술 점수는 또래 중 상위권이었다. 코치도 그녀를 아꼈다. 다만 코치의 눈이 서연을 볼 때와 아름을 볼 때, 그 눈빛의 온도가 달랐다. 아름은 그것을 알았다. 처음 알아챘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알아챘을 때는 이유를 찾으려 했다. 세 번째에는 그냥 받아들였다.
아름은 더 연습했다. 서연보다 한 시간 일찍 링크에 나왔고, 한 시간 늦게 나갔다. 체력 훈련도 추가했고, 표현력을 기르기 위해 발레 수업도 따로 받았다. 쓸 수 있는 것은 다 썼다. 그런데 어느 대회에서 아름이 실수 없이 완벽한 프로그램을 마쳤을 때, 관중석은 조용했다. 박수는 있었지만 탄성은 없었다. 다음 순서로 서연이 나왔다. 서연은 점프 하나를 삐끗했다. 그런데 관중이 웅성거렸다. 그 삐끗함에서도 뭔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점수는 서연이 높았다.
아름은 그날 집에 와서 오래 앉아 있었다. 서연을 미워하는 것인지, 세상을 미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셋 다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하늘 어딘가를 향해 손을 모았다. 목적지 없는 기도였다.
*왜 저는 아닌가요.*
처음에는 그것만 물었다. 대답이 없자 다음에는 요청으로 바꿨다.
*서연이 다치게 해주세요. 크게 말고, 딱 이번 시즌만 쉬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아름은 울었다. 오랜만에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결국 자신이 지금 서연을 저주한 것인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인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아마 둘 다였다. 기도는 그렇게 점점 형태를 잃어갔다. 처음에는 소망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원망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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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신은 바빴다. 다음 세대의 도면을 그리는 중이었다.
붓끝이 어딘가에 별표를 찍었고, 어딘가에는 찍지 않았다. 그 차이는 신에게 미학이었다. 다양한 농도, 다양한 굵기, 다양한 자리. 신은 재능을 고르게 나눠주지 않았다. 그것이 설계였다. 그리고 재능을 주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그 재능이 세상의 눈에 닿을 수 있는 자리, 닿을 수 있는 시대, 닿을 수 있는 순간도 신이 미리 배치해두었다. 준혁의 시험장에 장학사가 있었던 것도, 서연이 대타로 무대에 오른 것도, 신의 붓이 그어둔 선 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도현과 아름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신은 잠깐 고개를 들었다. 기도 소리는 분명했다. *간택해 달라고. 저도 보이게 해달라고. 저 아이가 잠깐 멈추게 해달라고.*
신은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들었다.
웃은 것인지, 무심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안했던 것인지. 도면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신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인간에게는 없었으므로.
붓은 계속 움직였다. 세상은 계속 그려졌다. 어딘가에서 오늘도 누군가가 태어났고, 그 이마 위로 보이지 않는 먹물이 내려앉았다. 별표인지 점인지는, 살아보아야 알 수 있었다. 아니, 살아봐도 끝내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것이 이 세상의 설계였다. 신은 그것을 알았다. 인간은 그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오늘도 손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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